▲ 홍종흠 시사칼럼니스트

한동안 학생 왕따 자살 사건이 자녀있는 모든 가정을 불안에 몰아넣더니 이제 묻지마 칼부림이 우리사회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이같은 사회현상은 이미 우리보다 선진국으로 일컬어지는 미국, 일본 등이 먼저 겪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치루게 되는 성장통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선진국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를 배워서 적용하면 될 것이란 안이한 태도로 임할 것 같은 걱정도 생겨나고 있다. 냄비근성이랄까 당시에만 불난집처럼 소란스럽다가 슬그머니 만성화되면서 아무 일 없는 듯 흘러갈 것 같은 생각 또한 떨쳐버릴 수 없다.

이번에 묻지마 폭력살인은 전국의 매스컴들이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문제점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불과 몇개월전에 세상을 흔들었던 학생 왕따 자살문제에 대한 논의는 벌써 시들해지는 듯해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우리 사회가 묻지마 폭력살인과 학생의 왕따 자살과 같은 심각한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이루는 원인분석과 그에 따른 처방을 국민 차원에서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우리의 장래는 한마디로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묻지마 폭력 살인만 해도 그렇다. 기억하기도 끔찍한 9년전 대구지하철참사는 사회에 불만을 가진 한 장애인의 묻지마 방화로 지하철을 타고 가던 무고한 시민 192명이 사망하고 151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었다. 그 뒤 사고의 수습과 관련된 보상과 기념사업, 형사적 행정적 책임문제로 옥신각신하다가 잠잠한 상태로 흘러가고 말았다. 묻지마 범죄에 대한 근본책은 그 뒤에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정부의 통계로 보면 우발적 범죄는 이미 대구지하철참사 이전인 2001년에 38만9천여건이고 그 이후 2009년에는 44만8천여건, 2010년에는 35만6천여건으로 엄청난 사고를 일상적으로 표출해오고 있었다. 학생 왕따 자살 문제도 이전부터 계속 일어났던 사안을 쉬쉬하고 덮어두다가 대구 사건을 계기로 전면적인 사회문제로 삼은 것이다. 이 때문에 사태의 본질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고 건수가 적은 대구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언론의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빗나간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사건이 만연하는 것도 사회병리적 현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를 고치고자 하는 자세가 흐지부지한 것도 우리 사회의 고질인 것이다. 사건의 추이로 보면 우리 국민 중에 누가 이런 피해자가 될 지도 모를 상황에서 그때 그때 자신만 걸려들지 않으면 금새 망각해버리는 것 자체도 병증이 아닐까. 이기적 집단건망증이랄까.

묻지마 범죄와 왕따 범죄에 대한 원인분석은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많은 분석을 내놓았지만 사회전체가 공감하는 수준의 근원적 접근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원인에 대한 공통적 접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근본대책이 마련될 리 없다. 기껏 소관 기관과 해당분야 차원에서의 논란과 지엽적 대책이 나왔을 뿐이다. 이같은 방식은 아무리 되풀이 해봐야 뚜렷한 성과가 나올 리 없다. 국가의 흥망이 걸린 사안이란 각성에서 국민적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고, 국민적 차원의 변혁을 가져올 대책과 처방이 필요한 것이다.

이들 문제에 대한 이같은 근본적 원인 분석이 없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사회는 공동체 해체현상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동체 해체의 가장 큰 원인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서로간에 벽을 쌓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자유경쟁이 사회발전의 요소가 될 수는 있지만 인간소외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세계적 석학들이 누누이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이제 1인당 소득 3만달러 시대에 진입하고, 외국에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됐다. 그런데도 공동체 구성원들 가운데 경쟁의 패배자나 사회적 약자가 세상을 저주할 만큼 비정한 사회가 되었다면 이를 고칠 방법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따뜻한 공동체를 만드는 처방이 병든 사회의 치료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