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나름 계획속에서 떠나는 여행이 대다수지만 우연히, 아니면 가다보니까 생각하지도 못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재미는 그어떤 여행보다도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몇해전 떠난 전라도로의 여행이 나에겐 그런 추억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때 이후, 같은 하늘아래에 있는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은 몇 번이나 계속 되었다.

찌는 듯한 더위, 그때 초여름은 어찌나 더웠던지, 무기력하고 10m도 채 걸어가기 싫은 나에게 부인이 온종일 떼를 쓰다시피하며 결국 짐을 챙겨 출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목적지가 어딘데” 라는 나의 물음에 “땅끝마을”이라는 짧은 대답한마디에 바로 주저 앉고 싶었다. 어디 가까운 옥계 계곡쯤 물놀이 가지 하고 차를 몰았는데 전라남도 해남의 땅끝마을이라는 청천병력같은 대답이 나온것이었다. 그 시간이 오후 3시, 그 순간부터 나의 고행 시간은 시작 되었다. 일하기 싫어하는 소를 몰고 밭갈이 하는 심정이랄까.

전망대서 만끽하는 다도해의 장관… 사계절 내내 관광객 북적
자전거와 연인들의 천국`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도 감동

더운 날이라 그런지 차도, 내 마음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벌써 헥헥 숨이 차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징징 거리며 차를 몰고가다보면 대구쯤 가다보면 돌아가자 하겠지. 설마 이시간에 땅끝마을 까지 정말 가자는건 아니겠지 하는 내심 맘속에 기대하며 천천히 차를 몰고 가보지만 그런 말은 나오지 않고, 어느덧 차는 남대구를 지나 88고속도로를 타고 있었다. 떠나기 싫은 여행이라 그런지 머리도 아파오고 몸도 아파오고 , 슬슬 짜증도 나기 시작할때쯤 막내녀석이 차안에 냉냉한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평소 안하던 온갖 재롱을 피우며 억지 개그도 하고 하는 모습에 대한민국 아버지의 근성이 나에게도 발동되었다. 그래 이왕 나온거 즐겁게 가자 싶어 “출발”이라는 구호에, 금세 차안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그때 차창 밖으로 거창IC 가 지나가고 있었다. 순천을 지날때쯤, 언젠가 보성차밭에 한번 가보고 싶었던 기억에 차를 보성으로 몰았다. 목포나 광주 등에서 전시회 기회로 한번씩 올때마다 느꼈던 동해안 과는 다른 이국적인 풍경이 눈앞에 계속 펼쳐지고 있다는 느낌의 종착역 보성차밭, 감탄사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더넓은 차밭을 거닐며 온산 가득한 차향을 마시며 아이들과 숨바꼭질도 하고 녹차 국수도 한그릇하고, 사진도 찍고 하다보니 주변에 어둠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순간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것은 숙박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 보성 차밭에도 몇동의 숙박시설이 있었지만 벌써 방은 하나도 없다. 주인에게 숙박할만한 곳을 물어보니 조금만 내려가면 해안가가 나오는데 그곳을 가보란다. 그렇지만 오늘같은 날은 예약을 하지 않았으면 방이 없을거라고 하며 몇군데 전화를 해보더니 순천을 비롯해 반경 30km안에는 방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 급히 서둘러 해안가로 내려올때는 어둠이 짙어졌다. 율포솔밭 해변을 내려가니 제법 번화한 곳인데도 방이라곤 한군데도 남아 있지않아 해안을 따라 굽이굽이 내려오는 해안도로가 동해 바다길 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조금더 내려오니 수문해수욕장(?) 해안가가 보인다. 몇군데 알아보니 역시 방이 없어 체념한채 마지막 큰 모텔이 있어 포항에서 왔다며 사정을 애기하니 역시 방이 없단다. 씁쓸히 돌아나오는 우리를 보곤 잠시기다려 보라더니 어느 곳에 전화를 돌렸다. 밤 9시에 예약을 한 손님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이 있다며, 그때가 밤 9시5분. 집사람과 눈치를 보며 대화내용을 멀리서 듣고있는데 “예약시간 이 지났으니 다른 사람에게 방을 주겠다”는 말소리가 들렸다. 방값은 5만원. 감개무량이었다. 방도 방이지만 최소 이런 성수기면 15만은 족히 부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밤늦게 아이들과 멀리서온 손님을 위한 마음, 그리고 바가지 요금이 없는곳. 이곳의 인심은 나의 뇌리에 그렇게 박혀 주위사람들에게 해남쪽의 인심을 지금도 자랑하곤 한다.
 

주인의 배려로 큰방에서 첫밤을 기분좋게 지낸 우리 가족은 다음날 일찍 다시 땅끝마을로 달렸다. 이런 시간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안개가 어찌나 많은지, 안개속으로 파도하나 없는 해안가는 신비감마저 들게한다. 아름다운 드라이브길, 해안길이라는 이정표들이 없어도 그길은 정말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한참을 달려 어느작은 어촌마을에 들러 간식이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에 차를 주차하는데 앞에 큰 돌하나가 서있는데`땅끝마을`이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는게 아닌가. 주변 풍경들에 매료되어 이미 땅끝마을에 도착하는 줄도 모르고 도착한 것이 우스워, 모두가 한참 웃었다.

암튼 이곳이 우리나라 땅의 끝이라는게 뭔가모를 신비감마저 들게하였고 가슴까지 뛰는 이상한 기분을 맛본 경험이었다.

땅끝마을은 상상 밖으로 꽤 번화했다. 본래 지명인 `토말`에서 2008년 `땅끝`으로 개명하면서 국토순례단을 비롯한 관광객들이 사계절 내내 국토 최남단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곳 사자봉 정상에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았다. 전망대가 세워지고 전망대에 오르는 모노레일이 개통되면서 한적하던 반농반어 마을은 해남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변신했다.

봉화대 위쪽, 사자봉 정상 바로 옆에 세워진 전망대에 오르니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남쪽으로 노화도와 보길도가 보였다. 또 눈을 돌리면 진도를 비롯하여 어룡도, 백일도, 흑일도, 조도 등 크고 작은 섬 20여 개가 눈앞에 가득 펼쳐졌다. 해질 무렵, 서해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펼쳐지는 낙조는 땅끝이 갖는 신비감과 함께 더 없는 황홀감을 안겨줬다.

돌아오는 길, 큰아들 녀석이 어디서 들었는지 담양에 있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가보자 한다. 광고에서 몇 번 봤지만 이쪽에 있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메타세쿼이아가 길은 담양읍 학동교차로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순창까지 이르는 길에 조성된 가로수 길로, 국도 바로 옆으로 새롭게 국도가 뚫리면서 이 길은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도로를 만든곳이다. 그 외에 15번 지방도, 29번 국도, 금성면과 순창군을 잇는 24번 국도 일부 구간에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가로수길의 총 길이 약 8.5km,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 길가에 높이 10~20m의 메타세쿼이아가 심어져 있는데 입이 쩍 벌어진다. 차를 한가운데 세워두고 영화를 찍듯 온가족이 연출을 하고, 집사람과 팔짱을 낀채 걸어가면 아이들이 연신 카메라를 돌려된다. 1970년대 초반 전국적인 가로수 조성사업 때 담양군이 3~4년생 메타세쿼이아 묘목을 심은 것이 현재의 울창한 가로수 터널길이 되었다고 하는데, 국도 24번 확대포장 공사 당시 사라질 뻔 했던 것을 담양군민의 노력으로 지켜낸 결과 현재 담양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나무는 경주 첨성대쪽 능을 따라 가면 내가 즐겨찾는 커피집 앞에 몇그루가 높이 서있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한 그 나무이다. 자전거와 연인들이 즐비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서 극치를 보여주었고 무심히 떠나는 여행이 주는 또다른 세계의 맛을 느끼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오늘 가까운 경주에라도 가서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보며 커피나 한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