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을 부둥켜 버틴 두 곱향나무의 위용이란…

보조국사 진각국사 등 16명 국사 배출

`무소유` 법정스님이 입적·출가하기도

“평화의 적은 어리석고 옹졸해지기 쉬운 인간의 마음에 있다. 평화를 이루는 것도 지혜롭고 너그러운 인간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이기보다는 인간의 심성에서 유출되는 자비의 구현이다.”(법정 스님 말씀)

이번 주는 평생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했던 법정 스님의 입적 및 출가 본사인 전남 순천시 송광사로 여행을 떠난다.

남도의 영산인 조계산의 넉넉한 품을 끼고 있는 송광사는 1200여년 전인 통일신라 말엽에 혜린선사가 송광산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후 고려 중엽인 12세기에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정혜결사 운동을 펼치고 조계산 수선사로 개칭했고 이후 고려 말에 조계산 송광사가 됐다.

송광사는 법보사찰인 해인사와 불보사찰인 통도사와 함께 삼보(三寶)사찰을 이루는 승보(僧寶)사찰이다.

보조국사 진각국사 등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대사찰이다. 송광사의 이름 높은 스님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지눌이다. 1190년 지눌 스님은 불교 쇄신 운동인 정혜결사 운동을 이곳 송광사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후 자신을 포함한 16국사를 이 절에서 배출하게 하는 등 수행도량으로서 기반을 닦았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50여 개의 크고 작은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국보와 보물, 지정문화재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대사찰이다. 본전 위쪽으로 오르면 2010년 입적한 법정스님이 17년 동안 머물던 불일암이 있다. 불일암에는 스님의 유골도 안치돼 있다. 불일암은 광원암, 천자암과 함께 송광사의 암자다.

기록에 송광사에는 열여섯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남아 있는 여섯 암자 중 하나이다. 송광사 매표소 입구의 주차장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차량이 장악하고 있었다.

불일암은 송광사 매표소에서 북서쪽으로 2㎞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매표소를 지나 개울을 끼고 경내로 들어섰다. 물소리와 산새소리가 교향곡보다 아름답게 들려온다. 대숲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가니 대숲으로 꾸며진 불일암 입구가 나온다.

대숲 출입구의 아치를 보면서 법정 스님의 가르침이 생각난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스님이 35년 전 심었던 후박나무와 해우소도 눈에 들어온다.

이제 800년 수령의 곱향나무 쌍향수로 유명한 천자암을 찾아 나선다. 천자암은 송광사의 산내암자다. 천자암으로 들어서는 길은 마루건물인 법왕루 아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천자암 절집이다. 옆으로 넓은 마당이 있고 그 유명한 쌍향수가 고개를 들어야만 보일만큼 크게 서 있다. 웅장한 모습이다.
 

이 곳엔 800년 남은 두 그루의 곱향나무(높이 13m·천연기념물 88호)가 자란다. 두 마리의 용이 솟구쳐 오르는 듯한 나무의 모습이 영험스럽다.

나무의 주름진 기둥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가지를 휘감으며 800년을 자랐다는 나무다. 두 마리의 용이 솟구쳐 오르는 듯한 나무의 모습이 영험스럽다. 귀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위용이 대단하다. 조계산에서 수도하던 보조국사와 제자가 지팡이를 나란히 꽂아 놓은 것이 뿌리를 내려 자랐다고 전해진다. 천연기념물 88호인 이 나무에선 길고 긴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천자암은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와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나란히 꽂은 곳에 절집을 짓고 천자암(天子庵)이라고 하였다.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두 그루의 나무만 남고 절집은 스러져 갔다. 현재의 절집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송광사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腹藏)유물이 있는데 조선 시대 복식사와 서지학사 인쇄문화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돼 2010년 8월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송광사의 많은 건물들이 한국전쟁 통에 불탔지만 16국사의 영정을 모시는 국사전과 목조삼존불감, 고종제서 등 국보 3점을 포함해 32점의 문화재가 보존돼 있다. 쌀 7가마 분량의 밥(4천인분)을 담아둘 수 있다는 대형 밥통 `비사리구시`도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