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내게 봄은 멀기만 한가, 하고 있을 때 마침 지인이 미나리 파티에 초대했다. 막 시작한 봄인데 미나리 농사는 벌써 끝물이란다. 제대로 된 미나리 철은 이월 말에서 사월 초까지란다. 서둘러야 미나리의 그 오묘한 맛의 세계를 접할 수 있단다. 아니면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다나. 시간이 잘 맞지 않아 어렵게 몇 사람이 모였다. 그리하여 올해의 내 봄맞이는 꽃구경이 아니라 미나리 맛 기행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지하청정수로 재배한 봄 미나리는 생으로 먹을 때 그 독특한 향을 살릴 수 있지만 삼겹살과 곁들일 땐 익혀도 제 격이었다. 혀를 즐겁게 하는 것 이상으로 내 눈을 오래 머물게 한 건 비닐하우스 속 그 푸른 행렬이었다. 맺힌 데 없이 싱싱하게 푸르른 미나리를 보고 있자면 봄은 미나리꽝에서 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나리 재배지는 실은 수몰지라 했다. 만수위(滿水位)만 되지 않으면 드넓은 땅은 경작지로 손색이 없을 것이었다.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노는 땅을 이용해 미나리를 재배하고, 그 이익금이 마을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었다. 고향이 수몰지역인 나로서는 이런 사실이 부러웠다. 고향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타지로 떠났기 때문이다. 다음날 내 맘을 알 리 없는 남편을 졸라 내 고향으로 향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무람없이 가는 곳이기는 하지만 이번 나들이는 아련한 수몰지에 대한 기억을 깨쳐준 저 미나리꽝 덕분이 틀림없다.
호우기가 아니라 멱찬 물이 되지 않아서 드넓은 들은 그대로 제 몸을 드러냈다. 옛 집터 자리도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십 년 전 어린 눈에 비치던 마을의 위용과 풍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버려진 그 땅엔 올 때마다 다른 식물군이 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자연적인 것도 있었고 인위적인 것도 있었다. 경작하지 않고 노는 땅일 때에는 내 생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상야릇한 야생꽃들이 수몰지를 뒤덮었다. 어느 해 늦봄 그곳에서 그 꽃을 보았다. 나는 고향 떠난 누군가의 혼백이 뿌려 놓고 간 향수일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해는 양배추 농원으로 개간되어 있었다. 어차피 노는 땅이니 어떤 객지의 농사꾼이 자신의 호기 팽배함만 믿고 씨를 뿌렸을 것이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양배추 밭을 보면서 그래도 누군가 그 땅을 활용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 달 쯤 뒤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엔 만수위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버려진 땅을 활용한다는 건 무모함을 시험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때를 알 수 없이 강수량에 의존하는 게 수몰지의 운명이니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저만치 집터 근처로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아직은 매서운 꽃샘바람이었다. 사람 잃은 무참함을 그저 견뎌야했던 땅덩이로서의 회한이 저 돌풍에 휘감기고 있었다. 그 아릿한 땅의 말씀을 놓치고 싶지 않아 애꿎은 셔터만 눌렀다. 원시의 건강함이나 의연한 땅심을 갖추지 못한 수몰지는 내게 가없는 안타까움이었다.
너무 적요하고 고즈넉한 그 풍경 속을 앓다 보면 어느새 현실감을 놓쳐버린다. 애틋한 사향심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그곳을 쉬 지우지 못하는 건 여전한 의문이다. 이 봄, 미나리꽝으로도 남지 못하는 모든 마음의 폐허와 허무를 위로하고 위로 받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