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했던 역사 간직한 만큼 볼거리가 지천

▲ 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

내가 묵은 쿠산다시는 에게해를 바라보는 항구도시다. 일어나 창 밖을 보니 구름이 끼었다. 8시30분 숙소에서 나와 20km 남짓 떨어진 에페소로 향했다. 셀주크에서는 3km 정도 떨어진 곳이지만 우리는 바닷가 쿠산다시에서 묵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택시 기사가 먼거리라 택시로 가야한다고 한다. 기사의 말을 무시하고 걸어서 간다. 나처럼 걷는 서양인이 저 앞으로 성큼성큼 걷는다.

 

▲ 니케의 여신상

기독교 신자라면 대부분 에페소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성경 `에페소서!`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쓴 편지글 형태의 신약성경이기 때문이다. 성경학자들은 바울로가 에페소에 2년 이상 머물렀다고 한다.

에게해를 배경삼은 대극장… 반원형 구조에 2만5천명 수용

발바닥 크기로 출입 여부 판단하는 옛 사창가 안내판 `눈길`

`성모 마리아의 집`서 받은 은총으로 여행에너지 듬뿍 충전

성경 에페소서를 떠올리며 에페소 박물관 북문으로 들어갔다. 관람은 쉽지 않을 듯 했다. 엄청난 유적을 수박겉핥기로 본다 해도 시간이 만만찮아 보였다.

북문 왼쪽 극장체육관(연극연습장)을 거쳐 대극장으로 향했다. 대극장은 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야말로 반원형 극장이다. 피론산 비탈을 이용해 기원전 3세기에 건립하였다. 지름이 154m, 높이가 38m인 반원형 구조다. 무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관중석에서 무대를 본다. 무대에 있는 성인이 작은 아이처럼 보인다. 대극장 무대는 서쪽방향이다. 무대 뒤편 아르카디안(항구) 거리가 보이고 멀리 에게해도 보인다.

기원전, 에게해 바닷가는 에페소 대극장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즉 대극장 밖 항구거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건너오는 도중 지진과 카이스트로스 강을 타고 흙이 씻겨 내려와 오늘의 해안(셀주크 성 요한 교회에 해안선이 어떻게 바뀌었나 그려놓은 부조가 있음)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헬레니즘 시대에 건축하여 로마 시대에 확장한 이 대극장에선 아직도 종종 공연을 하고 있다.

세계의 연기자, 성악가들은 이곳을 찾았을 때 자신의 끼를 펼쳐보는 꿈을 꿀 것이다.

 

▲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상징하는 4개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 셀시우스 도서관

대극장을 나온 난 항구거리를 둘러본 후 마블거리로 옮겼다. 그 때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이 제법 굵다. 배낭에서 우의를 꺼내 둘러쓰고 빠른 걸음으로 남문으로 향했다. 어디 빗방울 피할 만한 처마가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서 있는 돌덩이들이 비를 막아주지 않는다. 하나하나 돌들이 문화유적의 귀중한 자산이지만 떨어지는 빗물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빗방울을 맞을 뿐이다.

내가 남문에 서성일 때 빗방울이 수그러든다. 이내 빗줄기는 그쳤다. 안내소에서 지도 한 장을 구입했다. 남문쪽에서 다시 대극장으로 가며 지도를 짚어본다. 지도는 알아보기 쉽도록 번호와 그곳의 명칭을 써 놓았다.

“2번은 아고라. 3번은 오데온(Odeon). 오데온은 1천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음악당으로 당시에는 지붕이 있었음. 4번은 플라타네이온(Prytaneion) 고관들의 회의와 리셉션 장소, 시의회장. 사방 6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에는 여신 헤스타의 성화가 항상 불을 밝히고 있었다고 함. 5번 도미티안 광장, 6번 도미티안 신전, 7번 메미우스의 비(Memmius Monument). 폰토스의 난에서 에페소를 평정한 로마의 독재관 술라, 그의 아들 가이우스, 손자 메미우스를 상징하는 비로 후기 헬레니즘 시기에 지은 것이란 함, 비의 내용은 할아버지 술라를 칭송하는 내용이라 함, 8번 크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 9번 헤라클레스의 문(Heracles Gate) 크레테스 거리에 세운 헤라클레스의 조각을 새긴 문. 그 맞은 편에 니케 부조가 있는데 이것은 헤라클레스 문의 아치형에 있었다고 함. 10번 트라이누스의 샘(Trajan Fountain) 샘 중앙에 실물 크기의 황제 석상이 있었다고 함. 11번 스콜라스티카 목욕탕(Varius Bath), 12번 하드리아누수 신전(Temple of Hadiran) 2세기에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바쳐진 건물, 13번 수세식 화장실(Latrina)…. 17번 셀시우스 도서관(The Library of Celsius). 18번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Mazeus Mithridates Gate) 아고라로 이어진 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노비였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가 노비에서 해방되고 그 감사의 뜻으로 세운 문, 19번 아고라(Agora). 20번 대리석 길(Marble Road)”

 

▲ 미성년자란 증명을 발바닥으로 재었다는 사창가 입구 마불

나름대로 꼼꼼하게 지도를 짚어보며 에페소를 관람한다. 에페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입성으로 해방되었다. 그 모든 곳 하나하나가 역사의 한 자리에서 많은 인물들과 맥을 같이 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예를 든다면 17번 셀시우스 도서관은 시장터 옆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로마의 관리였던 디벨리우스 셀시우스(A.D 60 - 114년)가 아버지를 기념하여 건축(무덤 위)하였다. 알렉산드리아(현, 이집트), 페르가몬(현, 터키)과 함께 세계 3대 도서관으로 정면 벽에는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상징하는 4개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도서관 내부에는 5만권 정도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단다. 당시 책들은 양피지와 파피루스로 책이 상하지 않게 통풍이 잘 될 수 있도록 건물을 설계하였다.

헤라클레스 문과 메미우스 기념묘, 도미티아누스 신전의 중간에 니케의 여신상이 있다. 세계적인 스포츠 기업 `나이키`사가 기업 상징 마크를 만들 때 참고 했다는 니케의 여신상은 많은 관광객들의 손길에 오른쪽 가슴에 손때가 묻어 있다. 왼손은 월계관을 씌워주는 월계관이 들려 있으며,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아마도 종려 나뭇잎으로 추정한다.

그곳에서 많은 어른들의 입에서 빠뜨리지 않고 이야깃거리가 되는 한 곳을 더 소개하자면 브로델(사창가) 입구 대리석에 그려진 발바닥이다. `사랑의 집`을 가리키는 안내판 역할을 하는 이 표지는 그곳에 들어가려면 그 발보다 커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미성년자란 증명을 발바닥으로 재었다는 그 이면에는 젊은이들의 성적 욕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노천 박물관이다. 1천800여년 전 소아시아의 수도였던 에페소 곳곳을 견학하고 내가 다시 남문에 닿은 시간은 낮 12시가 넘었을 때였다.

남문 밖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향했다. 식당 주인에게 거리를 묻자, 에페소 남문에서 성모마리아 집까지 8km란다. 십리를 30분 잡는다면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물론 가는 도중 구경거리가 있으면 쉬엄쉬엄 구경하면서 말이다.

 

▲ 성모상을 모셔 놓은 `성모 마리아의 집` 내부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향하자 택시가 쫒아온다. 어디 가느냐는 말에 나는 그냥 `마더스 하우스 -The House of the Virgin Mary`라 했다. 그러자 꽤 멀기 때문에 걸어갈 수 없단다. 성모마리아의 집에 들렀다가 셀주크까지 가는데 35리라만 내라고 했다. 그냥 걷는다고 하자 기사는 얼마면 되겠냐고 묻는다. 20리라. 잘라 말했다. 되돌아갈듯하다 다시 나를 부른다. 오늘은 한가하니 그 돈으로 태우겠단다.

내가 택시를 타자 택시 기사는 산비탈로 차를 몰았다. 생각보다 친절한 기사였다.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만약 걸어서 갔다면 완전 등산을 하는 꼴이 될 뻔했다.

감사했다. 산길 정상에 올라 반대편 산자락을 조금 내려갔을 때 자동차 통과세를 받으며 입장료도 받는다.

가톨릭 신자로서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영광이고, 은총이다. 택시기사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에게 들어가 보라고 안내한다. 안으로 들어갈 때 만난 우리나라 사람들. 나 혼자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다니? 다른 관광지에서는 수도 없이 만나기에 무덤덤했는데….

그들은 성지순례 왔다고 했다. 반가웠다. 인솔한 분과 인사를 나누고 사진도 한 컷 찍었다. 그들은 이미 성모 마리아의 집에서 기도도 하고 셀주크로 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입구에 한글로 된 안내문이 있다.

성모 마리아 집 둘레엔 나무들이 울창했다. 왼쪽으로 들어가는 계단 옆에 성모 마리아 상이 세워져 있다. 분위기 자체가 숙연해지며, 푸른 나무를 비롯하여 그 모든 것들이 많은 은총을 베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를 낳은 어머니,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돌아가신 예수의 모습을 쓰린 가슴으로 끌어안았을 성모 마리아. 기독교 중 개신교는 성모 마리아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반면에 구교 가톨릭에 선 성모 마리아의 존재를 예수 다음 단계 정도로 놓는다. 사랑하는 아기 예수를 낳은 분이기에. 그들 통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도우미(?)로 여기고 그들 통해 기도한다.

`성모 마리아의 집`은 크기가 작았다. 안에 들어서자 아치형 벽돌 가운데 모신 성모 마리아 상이 보인다. 앞에는 꽃이 꽂혀 있고, 촛불이 밝다. 바닥은 카펫이 깔려 있다. 유럽인 몇 명이 무릎을 꿇고 기도 중이다. 나도 조용히 앉아 주모경을 받친다. 가족의 평안과 내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여행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드린다.

여행은 이런 감동에서 끊임없는 힘을 충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