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다는 것, 들리지 않는 외로움보다 더 아플까

청주에 내가 아는 지인 중에 한의원 원장님이 한분이 계신다. 차(茶)를 너무 좋아해서 진료는 일찌감치 그만두고 차에 빠져, 발효차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계시는 분이다. 원래는 전주 쪽에서 한의원을 하시다가 이 곳 청주로 작업실(?)을 옮겨 온지가 벌써 오랜 세월이다. 집에 차가 떨어질 때쯤이면 어김없이 보내주시며 “한번 올라오쇼” “이번에 제대로 된 게 하나 나왔소” 하시는 게 마음이 무거워 작업실도 구경할 겸 무엇보다 그곳에는 평소 존경했던 운보 김기창(1913~2001) 선생님의 운보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해서 냅다 차를 몰았다.

요사인 도로망이 좋아 김천에서 중부내륙선을 타고 낙동JC에서 새로난 당진~상주고속도로를 타고 문의IC에서 내리면 청주가 금방이다.

 

도착한 원장님의 작업실은 꽤 산속 깊은 곳에 자릴 잡았다. 녹차의 향이 진하게 배어 있는 원장님의 작업실에는 수없이 많은 단지들과 냉장고에서 차들이 발효되고 있었다.

“진료나 하시지 뭐하신다고 이런 고생을 하십니까?”라는 물음에 “사람 그만큼 살려 놨으니 이제 내 하고 싶은 것 해야지요”라고 큰 웃음 지으시는 모습이 대인(大人)의 모습 그대로였다. 입가에 녹향이 묻어 있는 상태로 작업실을 나와 청원 공설운동장 쪽으로 차를 몰아 운보의 집으로 향했다.

운보 선생님은 1990년 내가 대학을 졸업 후, 대구의 갤러리에서 큐레이터 일을 잠시 보고 있을 때 처음으로 뵈었다. 흰 수염 날리며 하얀 한복에 조금은 짧아 보이던 바지 사이로 빨간 양말과 흰 고무신이 인상적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크게 인사하고 옆에 서서 기념촬영을 하는데, 큰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듯한 기운을 느꼈었다. 어린 나에겐 그만큼 근접할 수 없는 위엄까지 뿜어져 나오는 그런 선생님이셨다.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 428-2. 설레는 가슴을 않고 도착한 곳.

운보 김기창 선생이 71세 되던 해인 1984년에 완공해 2001년 1월 작고 할때까지 생활한 곳이란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인적이 전혀 없었는데, 드라마 `김탁구`의 어머니가 살던 촬영장소로 쓰이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져 조금 더 유명해진 곳이다. 운보 선생님은 7세 때 청력을 잃었으나 그의 작품은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한국미술계의 거장이다. 최소한 몇 해 전 친일로 분류되기 전 까진 말이다. 이 곳은 운보 선생의 어머니 고향으로 인연이 된 곳으로 높은 대문을 지나 정원까지 2개의 중문을 지나면 안채가 나온다. 일반적인 고택의 웅장함과 격식의 복잡함과는 다소 거리가 먼, 넓은 정원에 여러 가지 희귀수석과 노송들이 즐비한 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는 한 채의 한옥은 그저 한번 살아 보고픈 그런 아름다운 가옥이다. 이곳에는 고택을 비롯해 미술관, 연못과 정원, 조각공원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운보의 묘 등이 있다.

고택 안에 들어서면 생전에 바깥을 보며 무료한 시간을 낚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단조로운 의자하나가 그곳에 앉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낸 선생님의 모습처럼 홀로 있다.

고택을 다시나와 약간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보면 운보 미술관이 나온다. 모처럼 먼저 온 이가 있어 홀로 그 길을 따라 올라 가는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친일로 분류된 후 사람들의 인적이 끊겨 버렸고 지난번 방문했을 때 주변 이들의 말로는 군에서의 지원도 끊겨버려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최근 전면 개·보수해 재개관했다고 한다. 드라마 촬영장소로 쓰인 탓일까. 이 곳엔 선생님의 독창적 예술세계와 전 생애를 걸친 주옥같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부인 우향 박래현 화백의 작품과 북한에 있는 동생 김기만 화백의 작품도 볼 수 있다.

한때는 한국미술의 거목으로서, 또한 한 TV에서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1위, 타계하시기 몇 년전 한국예술평론가협회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됐던 선생님이 지금은 친일로 분류돼 교과서에서도,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이 거대한 거목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까? 아니, 한의원 원장님처럼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모든 것이 풍족한 세상, 하지만 36년이라는 긴 식민지 그시절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었을까?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것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듣지 못한다는 느낌도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

/지금까지 담담하게 살아 왔습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소음 공해가 심한 환경에서는/

/늙어 갈수록 조용한 속에서 내 예술에 정진 할수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생각도 듭니다./

/다만, 이미 고인이 된 아내의 목소리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게 유감 스럽고/

/또 내 아이들과 친구들의 다정한 대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이 한이라면 한(恨)이지요….”

(운보의 어록 中)

이 어록을 읽어 내려가며 난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었다.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한 사람의 화가로서, 난 다음에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까. 선생님, 바라건대 이제는 두분 다 고인이 되셨으니 저 세상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사랑하는 아내와 대화를 마음껏 하시며 웃고 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