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우물` 지하도시에 삶과 죽음이 공존
로마시대 이후 종교탄압을 피해온 기독교인의 거대한 땅속 영토
화산흙과 바위로 뒤덮인 `으흘랄라 계곡` 트레킹은 아찔한 경험

▲ 으흘랄라 계곡(IHLARA VALLEY).

오늘은 그린 투어를 하기로 했다.

카파도키아 네브쉐히르 여행사에서 당일치기로 할 수 있는 여행 코스는 4가지다. 첫째가 네브쉐히르를 중심으로 어제 했던 북동쪽 코스 즉 레드 투어다. 2코스는 그린 투어로 남서쪽 코스, 3코스는 남동쪽 블루 투어, 4코스는 북서쪽 코스 즉 시티 투어를 말한다. 카파도키아는 네브쉐히르를 중심으로 사방을 관광할 수 있는 천혜의 관광 명소다. 이런 것과 함께 열기구 투어도 있다. 일반적으로 하루에 한 코스를 택하게 되는데 레드 투어와 그린 투어가 인기 코스다.

오전 10시에 `카이마클(KAYMAKLI)`의 중심 마을을 통과한 우리가 `데린쿠유 지하도시(DERINKUYU YERULTI SEHRI)에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였다.

데린쿠유? 이 도시를 내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기엔 아는 게 너무 없다. 한 시간 남짓 그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골목골목, 집집에 얽힌 숱한 사연을 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으흘랄라 계곡(IHLARA VALLEY)에서 만난 양떼.

어린 시절, 공상 과학 영화에 등장할 신도시를 나름대로 생각하곤 했다. 해양도시라든지, 우주도시, 아니면 지하도시였다. 얼마 전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 파울로 솔레리(Paolo Soleri)가 건축한 `아르코산티(Arcosanti)`를 소개한 글을 책에서 읽었다. `아르코산티`는 미국의 애리조나 사막 한가운데 짓고 있는 새로운 개념의 신도시다. 건축학의 이론으로 접근해야 할 `아르코산티`는 현재 5% 정도 짓고 있는데 공상과학에서나 가능한 것을 현실화시키고 있는 현장이라고 했다. 솔레리는 공간 낭비를 최대한 줄이면서 뇌의 주름을 펼치면 그 크기가 확대되는 것처럼 `아르코산티` 마을 자체를 자연과 인간 중심으로 꾸민다고 했다. 현재도 진행형의 이 도시는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성가족` 성당처럼 완성되려면 오랜 세월 흘러야 할 것이다.

데린쿠유에서 난 새로운 도시를 보았다. 땅 속에 길을 뚫어 만든 마을이다. 데린큐유는 `깊은 우물`을 의미한다. 카파도키아에 있는 최대 규모의 지하도시로 카미마클 지하도시와 연결되어 있는데 겉(지표)에서 보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도시다.

지표면에서 땅 속 40여m까지 수직으로 파 놓은 환풍 통로를 생각하면 우선 그 깊이에 놀랄 것이다. 그 환풍 통로는 지하 8층에 해당하는 가로 세로로 뚫린 길과 방과 집회소에 맑은 공기를 제공하게 꾸며졌다.

한동안 묻혀졌던 이 도시는 1960년대 초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는 어린 목동에 의해 발견돼 1965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모든 시절을 갖춘 지하 아파트라 할 수 있는데 최대 2만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 현재 지하8층(55m)까지 발굴했다. 그 밑로도 한참 더 내려갈 수 있다고 하니 그곳에 대한 상상력은 무한하다.

로마시대 이후 종교 탄압을 피해 지하로 피한 기독교인들은 땅속 영토를 조금씩 넓혔을 것이다. 그러면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 부엌도 있고, 술을 저장했던 창고, 동물을 키우던 곳도 있다. 지하로 뚫린 좁은 길은 밋밋하기도 하고, 계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넓은 공간이 나오고, 벽면에는 프레스코화 흔적도 보인다. 그곳은 교회다.

 

▲ `데린쿠유 동굴 내부.

죄인을 묶어 두었던 방도 있다. 안내하던 현지 가이드가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흉내를 낸다. 그렇게 묶어 두었던 곳이란다. 미로로 이어진 길을 잘못 밟으면 영영 바깥 세상 구경하기 어렵다는 현지 가이드의 농담이 사실일 것 같다.

중간 중간 구멍 뚫린 둥근 바위를 놓았는데 침입자를 막기 위한 돌이다. 믿음을 갖고 생활한 초기 기독교인의 생활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공상 과학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을 것 같은 지하 도시를 나오며 난 생각한다.

그곳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은 분명 어느 후일 밝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육신의 고단함을 넘어 내세의 영원한 행복을 추구했을 것이다. 오늘 터키 땅에 사는 그들의 자손 대부분은 선조가 믿었던 하느님과 다른 창조주를 믿는 이슬람교도가 되었지만 말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안가? 삶의 현실은 미래를 위해 늘 희생해야 하는가?

다시 나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화두다.

한 시간 이상 수박겉핥기식으로 데린쿠유를 관람한 우린 밤 11시 지하도시를 벗어나 우뚝 솟은 `하산HASAN(3262m)`을 바라보며 40여 분 달렸다.

차가 멈춘 곳은 `으흘랄라 계곡(IHLARA VALL EY)`의 절벽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깎아지는 절벽을 내려보니 그 아래 있는 생명체들도 우리를 올려본다.

계곡 아래로 물이 흐른다. 평지에 자라지 않던 나무들이 계곡 아래서 군무를 이루고 있다. 절벽으로 흘러내리는 듯한 바위들, 그야말로 카파도키아가 아나톨리아 고원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살감나게 해 주는 곳이다.

그곳에서 우린 십리 남짓 거리를 트레킹 하기로 했다.

출발지는 `으흘랄라 다비스(IHLARA VADIS)`였다. 그곳 역시 입장하려면 표를 끊어야 한다. 입구 쪽에 `아가칼티 교회(AGACALTI CHURCH)`가 있다. 암벽 벽면에 그리스도 승천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곳 역시 기독교인들의 굳센 믿음 흔적이 오랜 세월을 건너 뛴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나와 함께 걷는 일행은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이다. 독일인, 중국인, 프랑스인, 일본인….

 

▲ 야플락히사르(YAPRAKHISAR) 마을.

빨리 걸을 수 없다. 개울 옆 바닥의 검은 흙이 질퍽하다. 화산흙이기 때문이다. 얼마쯤 걷자 목재 다리 앞의 이정표가 눈에 띈다.

`뱀교회(YILANLI CHURCH)`는 100m, `카라게딕교회(KARAGEDIK CHURCH)`는 1km 가야한단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개울 왼쪽으로 걸었다. 또 한곳의 교회 `섬불루 교회(SUMBULLU CHURCH)`는 길에서 조금 비탈길을 올라가야 했다. 현지 길라잡이는 계곡 주변에 있는 많은 교회 중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만한 곳을 안내한다. 2층으로 된 이 교회 역시 벽에는 프레스코화가 있다. 바위를 뚫어 교회를 지은 과거 기독교인들의 그 놀라운 정신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으흘랄라 계곡`은 길이가 삼십리(12km)로 그곳 주변에는 5천호의 주택과 105곳의 교회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물 흐르는 개울을 따라 아래로 계속 걸었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양떼다. 한 무리의 양떼가 개울가의 겨울 풀을 뜯고 있다. 대장 양의 목에 종이 달려 있다. 움직일 때마다 딸랑딸랑. 그 소리를 듣고 주인은 양떼가 어디 있는지 알아낸다고 한다.

산세(山勢)가 두려움을 줄 정도로 가파르다. 바위가 데굴데굴 굴러 내릴 것 같다. 몇 년 전 지진으로 흘러내린 바위가 길 앞을 가로 막는다.

그것을 넘고, 밟으며 앞으로 간다. 전진이다. 배도 고프다. 목도 마르다. 오후 2시 넘어 버스가 대기한 식당에 도착헸다.

 

▲ 데린쿠유 동굴 안내도.

식사 후 대기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내 `야플락히사르(YAPRAKHISAR)`에 도착했다. 마을 뒤쪽 멀리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한 개의 바위덩어리로 그 경사가 산악훈련하기에 알맞아 보인다. 마을에는 겨울나무들이 기도하는 자세로 조용하다. 그 곳에서 바위를 뚫고 사람 살았던, 옛날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굴 집에 들어갔다. 지붕에는 잔모래가 뽀얗게 쌓여 있다. 산봉우리 가까운 바위에도 구멍이 뚫려 있다.

그곳도 한 채의 집이리라. 괜한 걱정이 든다. 술 마시고 집으로 가다 발을 헛디디면…. 아래를 내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몇 채의 옛집에 들어가보며 술래잡기하듯 몸을 감춰본다. 불쑥불쑥 솟은 봉우리들. 그 속에 동굴을 뚫고 살았던 옛날 사람들. 어쩌면 그것이 그들에게는 삶의 방식이었는지 모른다. 오늘 같이 지상에 벽돌을 쌓고, 문짝을 달고, 지붕을 만드는 건축술보다 그들은 바위를 뚫는 것이 더 쉬웠을지 모른다. 그들의 바위야 우리나라 산에서 흔히 만나는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다. 모래와 흙이 쌓여 단단해진 퇴적암이다. 쇠꼬챙이로 파면 쉽게 파지는 그런 바위다.

`야플락히사르(YAPRAKHISAR)`를 둘러보고 밤차로 파묵칼레로 떠나기 전 길 주변의 관광지 몇 군데를 더 관람했다. 그 모든 것들이 앞 풍경의 반복이다. 벌써 식상한 풍경이 됐다. 참 간사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