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살로메 소설가

내 노트북 자판은 상처투성이다. 자주 눌린 글쇠판은 보호막이 사라져 뜯겨나간 벽지처럼 속살이 훤하다. 벗겨진 정도에 따라 어떤 글자판이 혹사를 당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각각 왼손 검지와 중지가 주재하는 `ㄹ`과 `ㅇ`의 위쪽 모서리는 허옇게 까졌고, 오른손 중지가 관장하는 `ㅏ` 글쇠는 영어 자판 `K` 안내 표식이 사라지고 없을 지경이다. 모음이 몰려 있는 오른쪽 자판 보다는 자음으로 이뤄진 왼쪽 자판에 흠집이 더 많은데, 특별히 자판을 칠 때 왼쪽 손가락에 힘을 더 실어서가 아니다. 한글 자음이 초성과 종성에 다 쓰이니 왼쪽에 몰려 있는 자음 글자판이 더 빨리 닳아서 그렇다.

각설하고, 사용한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노트북 글자판이 이렇게 흠집 난 것은 오래된 습관 때문이다. 나는 자판을 누를 때 손바닥을 노트북 바닥에 대지 않은 채 손가락을 곧추 세워 내리 찍는 편이다. 가파른 손가락 각도 때문에 타이핑하는 소리도 시끄럽고 손톱에 힘이 실려 글쇠판이 쉽게 긁힌다. 이런 방식은 수동식 두벌 타자기를 칠 때 유용하다. 내 이십대는 수동식 타자기의 나날이었고, 노트북에 생긴 상처는 그 시절이 남긴 유물 같은 것이다.

대학시절 나는 한글 운동 모임 활동을 했다. 순우리말을 아끼고 퍼뜨리는 일이 주된 목적이었다. 한자어가 70퍼센트 이상 차지하는 게 우리 실정인데 순우리말을 사용한다는 건 거의 코미디에 가까웠다. 그래도 이십대의 열정과 우정으로 그것을 즐겼다. 한글 운동의 행동 강령 중 하나에 `글자 생활을 기계화하자`라는 것이 있었다.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예술적인 문자인가를 기계화로 실천해 널리 알리자는 취지였다.

개인용 컴퓨터가 일반화되기 전인 80년대 초중반이었으므로 그때의 기계화란 타자기를 활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거창하고도 멋진 슬로건이었지만 주변에 글자 생활을 기계화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당시 학생들 주머니 사정이 타자기를 구입할 만큼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토가 내겐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타자기로 글을 쓰고 싶었다. 탁탁, 경쾌한 리듬이 안내하는 대로 손가락을 맡기면 글 너울이 몸 안으로 퍼져, 저 발끝부터 쓸 거리가 되어 되번져 나올 것만 같았다.

타자기 마련은 멀기만 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학교 정보센터의 타자 교실에 등록을 했다. 강의가 없는 빈 시간마다 들러 자판을 익혔다. 개별자였던 자모음이 손가락 끝에서 유의미한 문장이 되어 꼬리를 잇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타자기를 갖고 싶은 소망은 큰오빠가 들어주었다. `열심히 써봐라.` 크로바 두벌식 중고 타자기를 구해주면서 큰오빠가 한 말이었다. 그렇게 타자기는 내 보물 1호가 됐다. 종이를 롤러에 끼우고 자판을 두드리면 글자 쇠막대가 잉크 묻은 리본 위를 덮쳤다. 새겨진 글자는 써야하는 자의 운명을 예고하는 낙인처럼 내 가슴에 박혔다. 그 크로바 타자기로 나는 리포트를 작성하고, 단상을 끼적이고, 시를 갈무리하고, 소설을 썼다. 타자기 덕분인지 졸업할 때까지 크고 작은 문학상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타자를 치려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손가락 각도를 가파르게 하고 손끝에다 힘을 주어야 한다. 계단식 글쇠판이라 글자를 누르는 동안 손바닥은 항시 허공에 떠있어야 했다. 이런 오래된 습관이 타자기 시대를 접은 지금도 남아 있어 생채기를 내는 것이다.

버리기 좋아하는 나는 이사를 핑계로 많은 물건들을 버렸다. 크로바 타자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버린 것에 대해 좀처럼 후회하지 않는 편이지만 부쩍 그 타자기가 그리운 나날이다.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타자기는 버렸지만 그 자리엔 고귀한 유물처럼 자판을 내리친 흔적이 남아 있다.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는 그 시절을 불러 모아 나는 지금도 탁탁탁, 상처투성이를 내리찍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