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41·마지막회> 해병(海兵), 그 붉은 이름의 추억 / 포항 남구 이용진씨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41·마지막회> 해병(海兵), 그 붉은 이름의 추억 / 포항 남구 이용진씨
  • 윤희정
  • 등록일 2011.12.25 20:49
  • 게재일 2011.1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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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4월15일 진해 덕산 비행장 누추한 격납고에서 적은 병력과 보잘 것 없는 장비로 대한민국 국군사에 빛날 첫 걸음을 내딛은 해병대(海兵隊). 그 후, 한국 전쟁과 월남전의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어 `무적 해병, 귀신 잡는 해병, 신화를 남긴 해병` 등의 애칭과 찬사를 받아 온 해병대 제 1사단이 본격적으로 포항에 주둔한 지도 반세기가 훨씬 넘었다. 수많은 해병들이 포항의 추억을 담으며 생활했고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태풍과 홍수, 폭설 다녀가는 세월동안 해병대는 언제나 포항시민과 함께 했다.



“해병대를 제외하고는 포항을 말할 수 없지요. 오늘날 포항의 성장이 있기까지 바탕이 되었던 정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학도병의 애국 애족 정신과 얼마 전 고인이 된 박태준씨가 종합제철소 건립 당시 외쳤던 우향우 정신, 그리고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즉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대 정신이었습니다. 이 셋의 공통점은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임했다는 것이지요.”

1969년 해병소위로 임관해 해병대 제1사단에 첫 발령을 받은 이용진(63)씨는 1983년 소령으로 예편 후 군무서기관으로 해병대 포항역사관 관장을 지내다 2006년 퇴임을 했다. 그의 기억을 들추자 해병이란 이름의 수없이 많은 청춘들이 일어선다. 부하도 동기도 선배도 상관도 붉은 명찰을 달았던 사람들이다.

그가 임관 할 무렵, 나라 안팎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수도권과 영남공업권을 잇는 산업의 대동맥인 경부고속국도가 1970년에 완공되고, 그 해 영일만에서는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꿈을 건 포항종합제철소 건설의 대역정이 활기차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65년부터 72년까지 월남파병이 이어졌고, 68년 1월21일 무장공비들이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기습하려 침투했던 이른바 김신조 사건으로 전군이 긴장사태에 돌입하기도 했다. 해병대도 타군보다 짧았던 사병 복부기간이 36개월로 늘어나는 등 혼란기를 겪기도 했는데 당시 사병들 사이에서는 `신조 때문에 신세 조진 사나이`라는 노래가 돌기도 했다.

“따블백(duffle bag)에는 마른 오징어와 고추장을 챙겨 넣었지요. 부모나 애인 사진을 품고 가기도 했지만 행여 마음이 약해지거나 당시 돌던 이설 때문에 일부러 챙기지 않는 해병도 있었습니다. 포항역에서 막상 군용 열차에 올라타고 보니 장교 계급장을 달아도 만감이 교차합디다.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철수 무렵이긴 했지만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양다리가 잘렸다는 소식들이 월남에서 날아들었으니까요. 부산항 제3부두에서 뚜우 뱃고동이 울릴 때 흘러나오던 노래가 뭔지 아십니까? `잘있거라 부산 항구야` 였습니다. 단단히 무장한 마음을 완전히 풀어버리는 그 노래에 하나 둘 찔벅찔벅 눈물을 짜고 결국은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지요. 지금도 가끔 그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그는 70년 월남에 파병되었다. 본인의 의사만으로도 파병을 결정할 수 있었던 그때 유독 면회객이 많았다. 강원도, 전라도 골짜기에서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는 가족들의 목적은 대부분 어떻게 해서든 파병을 만류하기 위해서였다. 부모 형제의 간곡한 설득에도 수많은 해병들이 월남으로 향했다. 사회에서 어두운 터널을 지났던 사람도 귀하디귀하게 자란 사람도 해병이란 이름 안에서는 똑같았다. 어렵고 힘든 상황 일수록 전우애는 두터웠고 충성심은 더욱 강해졌다. 죽을 지도 모르는 전선에 가면서 어찌 만감이 교차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박 깎은 머리에 흰 이를 드러내고 악을 쓰며 전진하던 청춘들을 잊을 수가 없다.

“타군 장교들이 해병대를 부러워했던 것 중 하나가 전령입니다. 육군은 당번이라고 하는데 역할은 똑같이 지휘관을 보필하는 것이지만 해병은 달랐습니다. 소대장 목숨 하나는 내가 지킨다는 사명을 지녔었지요. 월남전에 참가 했을 때 제게도 소수영이란 이름의 전령이 있었습니다. 평택이 고향이고 곱상한 얼굴에 말을 조금 더듬던 부하였지요. 필요한 것은 어디서든 구해 왔고 매복을 나가면 제 군장을 모두 짊어지고 절대 주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적의 공격이 있을 때 저를 제 몸으로 덮은 적도 있구요. 상관을 향한 절대복종 정신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겹습니다. 부하이기 이전에 고마운 사람이지요. 그가 먼저 귀국을 하였지만 지금도 연락을 하며 삽니다.”

해병은 충성심만큼이나 객기 또한 충만했다. 별스런 노래를 핏대 세우며 불러댔고 지고는 못사는 기질 때문에 사고도 많이 쳤다. 외출을 나가면 땡깡을 부리고 가끔은 젊은 혈기에 타군과 패싸움이 붙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해안 훈련이나 작전을 나가면 민가에서 슬그머니 고추장 된장독도 들고 오고 덕장에 오징어도 걷어 왔다. 동네 아가씨도 꼬셔 보고 지순한 사랑으로 마음도 앓았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골칫거리일 수도 있었으련만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 나라에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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