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잎 나부끼는 소리 그득한 `竹島山`
70여년 바다 밝힌 등대 지금은 명소

강구항에 들어서자 겨울이 무럭무럭 김을 올리며 익어간다. 입구부터 빼곡하게 늘어선 상가 수족관 마다 대게가 가득하고 관광객과 상인의 흥정이 한창이다. 항을 벗어나자마자 이내 열리는 푸른 바다. 오르고 내리고 다시 휘도는 도로를 바다가 따라 나선다. 노물길을 지나고 경정길을 지나는 내내 명태, 청어, 양미리, 오징어 등 바다가 선물한 날것들이 말갛게 몸을 널어 말리며 한 생을 넘기고 있다. 힘겨운 고빗길에는 희망처럼 등대가 서있고 바다로 내달리는 기슭에는 온갖 풀들이 눈망울 같은 꽃을 피우고 접는다.

강구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장장 50km에 이르는 해안길 도보여행길 블루로드 중 B코스 종착지에 해당하는 죽도산과 축산항. 축산은 지형(地形)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形局)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남면(南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3월1일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장동, 차유동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축산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축산리가 돼 현재 축산 1,2,3리로 분동되었으나 아직도 마을 어른들은 골새마, 신기동, 아릿염장, 염장(鹽場), 웃염장, 장방등, 재궁마, 주막거리, 중간마 등 정겨운 지명들을 사용하고 있다.

축산천 냇거랑이 바다로 흘러드는 곳에 블루로드 현수교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와우산(66.3m)과 말미산(113,5m) 사이에서 마치 밥공기를 엎어 놓은 듯한 죽도산(87m)이 오목한 항구를 바라본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영덕 일대를 살펴보면 영덕과 영해로 나누어져 있음을 살펴볼 수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은 지금의 축산항이 있는 축산포 앞에 `축산(丑山)`이라는 섬이 바다에 떠있다는 것이다. 당시 축산섬이 지금의 죽도산인 셈이다. 섬이었던 이곳은 일제시대때 바다를 매립하여 육지와 연결 되었다. 300년 전에 오씨(吳氏)와 추씨(鄒氏)가 함께 대나무를 심고 죽산동(竹山洞)이라 했다는 곳, 산 전체에 대나무가 많다하여 죽도산, 혹은 죽산이라 부르는 이곳은 삼국시대 이후 왜적의 침입의 주 통로로 국가에서 수군만호(水軍萬戶)를 설치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를 침략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건설하였으니 역사의 대비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죽도산은 명당으로도 알려져 있다. 옛날 일본의 한 중(僧)이 우리나라에 와서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명당산(明堂山)이라는 산은 모조리 사기 말뚝(쇠말뚝은 썩기 때문에)을 박아 인재 나는 것을 막았는데 한번은 지도에 있는 죽산에 대고 말뚝을 박으니 그 산으로 장군이 올라오다가 죽었다고 한다. 산 정상에 있는 죽도등대를 향해 나무 계단을 오르다 돌아보면 전해오는 일화를 알지 못해도 이곳이 분명 명당일거라는 기운을 감지하게 한다.

등대로 오르는 길 가에 두 개의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대나무 잎이 무성해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망향대`다. 앞의 것은 세월을 말해주고 뒤에 선 것은 사연을 들려준다.

`시조 영의공께서 고향을 그리고 바라보시던 곳으로 철종 무신년 봄에 의령 후손 영해 부사 상교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이곳 일가 진사 고에게 돈을 주어 경술년에 죽도에 세웠으나 풍상에 훼손되어 옛터에 새로 세웠다. 2010년 7월 남씨종친회`

축산은 8세기 중기인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나, 영양남씨(英陽南氏) 입향시조 유래로 더 유명하다. 즉, 경덕왕 14년(755년) 당(唐)나라 현종(玄宗) 연간에 김충(忠)이란 안렴사(按廉使)가 일본 사신으로 다녀오던 도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이곳 축산에 표착(漂着)한 다음 신라에 살기로 청원하자 경덕왕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씨(南氏)로 사성(賜姓)하고 시호를 영의(英毅)라 내리고 식읍(食邑)을 영양(英陽)으로 정하였다. 이로써 남씨 시조가 되었으며, 뒤에 영양, 의령, 고성으로 분관되었다는 자료를 볼 때 이 비석은 영양남씨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리라. 비석 곁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니 옛사람에게 다녀갔을 그 망망한 그리움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죽도산 해발 80m 정상에 하얀 등대가 하나 서 있다. 죽도등대다. 1935년 세워진 이 등대는 지금도 칠흑같은 망망대해에서 축산항으로 들어오는 어선의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처음 세워진 당시에는 포항 장기와 울진 중간에서 북극성처럼 빛났다고 한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 왜적 방어의 방어선으로 적의 침략시 봉화대의 발화산으로 봉화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죽도산은 군사보호시설로 묶여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 죽도산 개발에 대해 조건부 승인을 받고 기존의 등대를 높이고 등산로와 산책로를 조성go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동해는 세상 근심을 덜어내고 잊게 한다. 푸르기 한이 없는 바다의 웅장하고 유유한 몸짓이 온몸 가득 차오른다. 죽도등대 바로 아래에는 쉼표처럼 `코난`이라는 찻집이 있다.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바다에 다가앉으니 혜령이란 이름의 아가씨가 차를 내어 준다. 바람이 대숲의 경사진 이마를 쓰다듬으며 바다로 달려간다. 산의 머리칼이 신나게 춤을 춘다.

죽도산은 이름 그대로 대나무 세상이다. 간혹 키 작은 잡목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신우대, 오구대 또는 이대라 불리는 시누대(失竹)가 빼곡한 숲을 이룬다.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 댓잎 사이로 부는 바람의 노래가 온 산을 조용히 흔든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가녀린 댓이파리 젖는 소리에 내 귀도 젖겠다. 저들도 어느 계절인가 일제히 꽃술 올리기도 할 것이다. 한 때는 싸움터에 나가는 병사의 화살이 되고, 마당 빗자루가 되고, 담뱃대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방패연의 연살이 되어 하늘 높이 날기도, 청국장을 띄울 발장이 되기도, 물고기의 눈을 꿰기도 했을 것이다. `시누대 숲에 바람 분다. 왕대처럼 꼿꼿하지 못한 내가 무척 흔들린다`던 어느 시인의 시 구절처럼 누군가는 이 숲에 사연도 풀었으리라. 저기 축산항 어디쯤에서 늙어가는 청상의 사연도 대숲은 구구절절 쓰다듬었으리라.

<계속>

권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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