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신객원 논설위원국제로타리 공공이비지 코디네이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글을 잘 썼다. 손재주가 좋기 때문이다. 사경은 삼국시대나 신라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부처님말씀이신 불경의 긴 내용들을 종이에 정성스럽게 베껴 쓴 것들이다.

이런 사경정신으로 인해 우리나라 불교는 1세기경 히말라야와 미얀마·윈난성을 넘는 두 길로 들어온 중국보다 상당히 늦게 4세기부터 시작됐지만 불교가 갖는 정신세계는 더 화려하게 꽃 피었다.

`국보 196호 대방광불화엄경` 등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40건이 넘는다. 화엄경을 필사하는 데 쏟는 정성과 기술은 우리나라 불교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친 중국도, 우리불교를 가져간 일본도 못 따라올 경지까지 갔다.

금이나 은을 아주 얕은 가루로 만들고 닥나무로 만든 최고 품질의 종이에다 적당하게 녹인 아교를 두 서너 차례 바르고 말린 다음에야 글을 썼다. 한자를 쓸 때마다 절을 했다.

일자삼배(一字三拜)는 한자 한자를 쓸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는 최상의 방법이다.

관음보살 보문품을 세수 70에 쓴 경주의 서예가 심천 한영구 선생도 보문품을 쓰기 전 경주 백률사로 오르는 사면석불에서 천배씩 절을 올리고 마음을 가다듬고서야 붓을 잡았다고 한다.

한국 개신교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정착, 성장한데도 우리의 전통 사경이 한몫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신앙공동체인 황해도 소래교회는 의주에서 무역상을 하던 서상륜이 만주에서 들여온 한글 번역 복음서에서 출발했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이다. 이들은 이 복음서를 베껴 서로 돌아가며 읽고 교회를 만들었다. 소래교회 사람들은 누군가가 요한복음·누가복음 필사본을 빌려오면 내 것과 함께 다른 한권을 더 베껴 나눠주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다.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성경을 읽고 쓰고 공부하는 것으로 채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이 땅에 도착한지 사반세기도 안 돼 성경전체가 한국인들의 손에 쥐어질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했다. 한국인들의 애착과 집념을 두고 한 말이다.

불경이나 종교의 경전을 베끼는 사경의 목적은 경전에 담긴 진리를 남에게 전화고 그 믿음의 세계로 자신이 들어가려 했을 것이다.

불경을 사경하고 외우고 지니는 것이 구법(求法)이나 수도의 오롯한 과정으로 여기다 보니 한자 한자 정신을 집중해서 쓰다보면 몸도 마음도 깨끗해 짐을 체험하고 빠져들었을 것이다.

사경(寫經)은 원래 서예의 한 영역이었다. 우리나라 전통사경은 주로 해서체를 중심으로 발전돼 왔다. 사경은 신라보다 고려에 들어 불교 지식층과 예술인들이 합작품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같은 걸작 품이 후세에 전해지게 됐다. 우리나라와 일본 사찰에 남아 있는 걸작들은 대부분 고려 사경으로 보면 된다.

불심이 남달리 깊었던 고려인들은 다양한 서체와 부처의 법구(法句)가 갖는 의미를 고스란히 담긴 사경을 만들어 내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는가하면 “느림의 미학”이 골수까지 전달되는 사경의 장엄미로 인해 필사를 쉽게 놓지 못했다.

중생의 마음은 백지위에 떨어진 먹물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삶의 번뇌는 시장 채소장사에게도 있는 것처럼 고려인들은 한자 한자를 정성스럽게 써 내려가는 것으로 번뇌를 잡고 마음의 불국을 세웠던 것 같다.

1천700년을 이어온 한국의 전통사경은 장구한 역사적 사실이자 세계에 내놓을 만한 문화유산이지만 지금은 컴퓨터자판을 두들기는 현대이기에 밀려 사리질 위기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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