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바다를 그리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죠”

동해대로를 달린다. 길이 낳은 길들이 바다로 흘러간다. 허파꽈리처럼 절망절망 매달려 삶을 깁는 내항의 배들과 붉고 푸른 양철 지붕을 얹고 옹기종기 어깨를 건 집들. 후포를 지나고 평해를 지나 울진에 닿는 내내 펼쳐진 경전 같은 풍경에 파도는 손뼉을 친다.

투박하지만 순박한

생명력 강한 동해 바다

테크닉과 세련됨이 아닌

진실성과 익숙함으로

풍경과 정서를 담아낸다

“왕피천이 흘러 내려간 근남면이 선조 때부터 살던 고향이었지요. 외지에서 군생활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죽변에 터전을 잡으셨습니다. 젊어서는 저도 도회지에 나가 공부하고 작업도 했지만 고향만큼 제 기질과 잘 맞는 곳은 없었습니다. 결국 1992년, 서른두 살에 서울을 버리고 화구만을 챙겨 무작정 내려 왔지요”

울진군 북면 `주인예술촌` 2층에 있는 화가 홍경표(52)씨의 작업실은 선으로 색으로 출렁이는 또 하나의 바다였다. 생명력 강한 바다의 기질과 투박하고 질펀한 이면에 순박함을 지닌 이들의 삶이 맛좋게 버무려진 작품들. 붉은 바위와 노니는 흰 파도, 눈이 소복이 내린 마을의 설레는 지붕들, 억새 피는 가을 둔덕에서 빛나는 등대, 모두가 바다를 향하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운 외모를 풍기는 그의 눈빛과 의식 또한 바다를 닮은 듯 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십 대 초반에 청상이 된 어머니에 대한 맏아들의 연민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도시의 삶이 싫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가르쳐 준 성향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또 자본이 가지는 논리 이외에도 분명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확신도 들었다. 올려면 오고 말라면 말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고향에 내려온 지 6개월 만에 아내는 모든 걸 정리하고 세 딸과 함께 울진으로 내려와 주었다. 고마웠다.

“주로 그리는 게 제 고향 주변의 항구, 어촌 마을의 특성들입니다. 가파른 지형 끝에 마을이 형성되고 집들이 마치 달동네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제 눈에는 상당히 괜찮은 소재로 다가왔지요. 형이상학이 뭐 별겁니까? 질박한 삶 속에서 찾을 진실이 있다면 그게 형이상학이지요. 극단적인 상황 속에 휘몰아쳐서 거기서 뭔가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요? 무엇보다 화가라는 사람, 작가라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터전과 시대의 삶에 누구보다 충실해야 한다고 믿어요. 제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여기 밖에는 없잖아요. 그러니 지금 제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작업은 동해를 캔버스 가득 담아 방류하는 것, 그것뿐이지요.”

친구들은 고향에 온 후 그의 그림이 상당히 밝아졌다고들 한다. 도시에 살면서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사실주의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유년의 익숙한 풍경을 끊임없이 울궈먹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 자연과 마주보고 살면서 그리는 그림은 색에 대한 감각이 건강할 수밖에 없는 것. 자연과 맞대응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한 구성원으로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과의 동행 역시 그림을 넘어 지혜와 깨달음을 가르쳤다.

`지방성`이라하는 것, 그것이 보편성을 띄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형상을 묘사 할 때 테크닉의 세련됨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진실성을 바탕으로 가면 충분히 보완을 하고도 남는다. 그것이 지방성의 장점이다. 그는 누구보다 고향 바다의 풍경과 사람들의 정서를 잘 담아낼 수 있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오래 바라보고 오래 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간이 작가의 작품을 통해 유일성을 확보하고 대중성 또한 확보 하는 것, 그것은 개인의 자존과 함께 마을의 자존도 증명하는 것이다.

“화가로 살게 된 기미를 굳이 찾으라면 어머니의 성향을 꼽고 싶습니다. 외형적인 것을 좀 따지는 분이셨거든요. 없이 살아도 옷맵시는 고와야 하고 낡은 것이라도 늘 깨끗이 빨아 입어야하며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누려야 한다는 분이셨습니다. 봄이 오면 문에 창호지를 바르셨는데 장식하기를 좋아하셨어요. 창호지 사이에서 드러나는 대나무 잎의 실루엣은 정말 예뻤습니다. 그러고 보니 외가 쪽으로는 예술 작업을 하는 이들이 제법 있네요”

그는 문학을 공부하고 후에 그림을 만났다. 미술을 전공 하지 않은 것이 젊은 시절에는 다소 약점처럼 느껴지기도 하였으나 이젠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테두리 안에서 배운다는 것, 가지고 있는 본바탕에서 적응을 깨뜨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역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사실에 근접한 그림을 화가적 안목으로 재구현하고 토해내는 과정, 그 만의 감각으로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며 심상을 거쳐 재조명된 사실적 자연을 꿈꾸는 재미가 크기 때문이다. 다듬은 것이 아니라 원시적인 `날것`이 가미된 그림,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닌 그림, 그렇다고 `사실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림.

“아주 예쁜 여자를 만났는데 마침 동향이었어요. 정성을 다해 꼬셨습니다. 순진하게 넘어 온 대가를 아내는 지금도 치르고 있습니다. 마등족이라고 아세요? 우리끼리 하는 속된 말로 마누라 등쳐먹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전업작가나 시민운동가 중에 주로 마등족이 많은데 아내들은 그들의 응원자와 보호자 역할을 훌륭히 해내곤 합니다. 저도 꽃집 주인인 아내가 늘 고맙지요. 덕분에 맘 놓고 그림을 그립니다”

고향 바다를 그리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건 곁에 사는 이들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는 `핵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대표를 맡아 매주 목요일 이면 군청 앞에서 촛불시위를 한다. 비가 다녀간 뒤 바다는 물빛 퍼렇게 세우고 은행나무는 샛노란 물감을 한껏 풀었다. 오늘은 아름다움을 바라볼 권리를 위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야 할 목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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