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양지인(宋襄之仁)

`송양지인(宋襄之仁)`, 송나라 양공의 어짊.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분수도 없이 남을 동정하는 것을 비웃어 하는 말에서 시작돼, 소용없는 동정을 일컫는다.

춘추시대 송나라 양공이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었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춘추좌씨전` `희공` 22년 조, `십팔략` 권1 등에 소개돼 있다.

춘추시대 주나라 양왕 2년(B.C.650) 송의 환공이 죽자 여러 공자가 서로 왕위를 다투면서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이 혼란을 마무리지은 것은 송나라 양공이었다.

그는 환공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있던 태자소를 조, 위, 주군과 연합해서 추대했으니 그가 제의 효공이다.

양공은 패자의 후사를 제 힘으로 정한 데 고무가 돼 패자가 될 야망을 품고는 기원전 639년 가을에는 송, 제, 초 세 나라를 불러모아 그 맹주가 되려다 초의 성왕의 강력한 반발로 망신을 당했다.

그러나 이에 굽히지 않고 양공은 이듬해 정나라가 초에 굴복하자 이를 책망하여 정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해 겨울 11월 초,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군과 홍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이때 이미 송나라 군대는 전열을 다 가다듬고 있었는데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를 본 공자 목이가 이렇게 건의했다.

“적들은 많고 아군은 적습니다. 그러니 아직 다 건너기 전에 공격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양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후 강을 다 건넌 초군은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사마가 다시 건의했다.

“아직 전열을 다 가다듬기 전이니 공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러나 양공의 대답은 같았다.

“아직 아니다”

그리고는 초군의 전열이 완전히 갖추어진 다음 공격을 시작했다.

결과는 물론 열세였던 송군의 참패였고 양공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깊게 입었다. 여러 사람이 원망하자 양공은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다친 군사를 또 공격하지 않으며, 늙은이를 포로로 잡지 않는다. 옛날 싸우던 방법에서는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지도 않았으니, 과인이 비록 망한 나라의 후예이긴 하지만 아직 진영이 갖추어지지 않은 군대를 공격하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공은 결국 이 입은 상처로 이듬해 죽고 말았으니 세상에서는 이 일을 가리켜 양공의 `부질없는 어짊`이라고 말하면서 조소했다.

/쌍산 김동욱

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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