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갈에 관한 현존하는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최고의 자서(字書)의 하나인 `이아(爾雅)`로 기원전 3세기에서 5세기 경에 기록되었다. 이 문헌에서는 생선으로 만든 젓갈을 `지`, 육류로 만든 젓갈을 `해`라고 부른다. 한국의 젓갈은 신석기 시대에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신문왕 3년(683년)의 기록에 왕후를 맞이하는 폐백 음식으로 등장했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는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해졌다. 경북 해안 지방에서는 오징어젓, 갈치젓, 꽁치젓, 멸치젓과 전복의 내장을 이용한 전복내장젓 등을 주로 담그는데 경주시 감포읍 일대에서 생산되는 멸치젓은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오래전 감포 바닷가 마을은 멸치를 잡는 후리배가 많아 `후리자네`라고 불렸다. “어야차야 어야차 어야차야 어야차 어차 어차 어야차.” “쟁야 쟁야 쟁이야 쟁야.” 배를 항에 대어놓고 선원들은 얼굴부터 발끝까지 비늘을 뒤집어쓰며 그물을 털었다. 그러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양동이를 들고 나가 그물 밖으로 튕겨나오는 멸치를 주워 담았다. 떨어지는 멸치를 줍는 것은 누구도 막지 않았다. 지금은 매립을 하여 도로가 나고 수협 건물이 들어섰고 또 환경오염으로 인해 배 위에서 그물을 털기 때문에 그런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올해로 3년 째 감포 5리 이장을 맡고 있는 이광호(45)씨, 그는 김장철이 다가오면서 액젓을 출하하느라 바쁘다. 바깥마당을 다 차지한 간독에서 1년을 푹 삭은 멸치젓을 걸러 커다란 통에 담고 다시 용기에 담아 개별 포장을 하고 트럭에 싣는 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간독은 가로 세로 약 2미터 50정도 정사각형 작은 독과 2m70정도의 큰 독을 합해 모두 열두 칸이 있는데 이는 일제시대 때 방어를 염장하던 독이라 하니 70년은 족히 넘었으리라. 할아버지 대에 시작한 멸치젓갈 사업이 손자인 광호씨에 이르렀으니 간독 하나에 3대째 생을 걸고 살아 온 셈이다.

“경주 모량이 고향인 할아버지께서 농협에 근무 하셨는데 발령을 받고 감포로 오셨지요. 그 해 제가 태어났으니 꼭 45년 전 일입니다. 처음엔 삯월세를 얻어 살았는데 69년도에 지금 사는 이집을 장만 하셨대요. 작고 허름한 양철집이었지만 간독 하나를 보신 거지요. 3년 후인 72년에 시작한 젓갈 사업은 농협 유통망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거래처를 넓혀 갔고 번듯한 집도 짓게 했습니다.”

멸치를 판장에서 받으면 인부 6명이 한 조를 이뤄 일을 했다. 멸치를 내리는 사람, 상자를 부어주는 사람, 소금을 뿌리는 사람, 그리고 세 사람이 간독에 들어가 멸치와 소금이 잘 섞이도록 버무렸다. 일꾼들이 성의있게 안해주면 낭패였다. 소금이 고르게 섞이지 않으면 그 부분은 썩기 때문이다. 버무리고 나면 나무를 열십자로 덮고 부풀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다시 큰 돌을 올려놓았다. 두 사람이 겨우 들어야 하는 무게의 돌은 마리젓의 형체를 온전하게 유지하게 하고 녹는 속도를 더디게 했다. 그리고는 이듬해 봄부터 출하할 때까지 틈틈이 염도를 측정하며 간독을 드나들며 1년 남짓 공을 들였다.

물건을 포장할 때도 일일이 손으로 작업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꼼꼼하게 묶어 보내도 발효 음식인 탓에 깡통 안에서 숙성이 일어나 가스가 차고 액이 흘렀다. 당연히 반품이 많았다. 제품의 문제 보다는 포장 기술의 미비와 취급의 문제가 대부분이었지만 많게는 10개 중 5개가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팔리는 것만 수금해야 했다. 그 후, 포장 기계가 들어오고 과정이 야물어지면서 반품 양이 줄고 수입은 조금씩 나아졌다.

“어릴 땐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에서 나는 비린내가 정말 싫었어요. 그러나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는 겨울방학마다 저도 일손을 보탰습니다. 주로 포장을 하고 차에 싣는 일이었는데 친구들까지 불러 일을 했는걸요. 할아버지께서 일꾼들 돈을 줄 때 저희에게도 용돈을 주셨어요. 그걸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그랬습니다.”

할아버지는 참 부지런한 분이셨다. 직장이 있었지만 퇴근 후에는 식당마다 다니며 음식 찌꺼기를 받아다가 돼지도 키우고 닭도 키우셨다. 일꾼을 부리는 것에도 철저했다. 겨울철이면 일꾼들이 3개월 정도 묵으면서 일을 했다. 귀찮을 정도로 쫒아 다니면서 소비자에게 가는 것이니 제대로 해야한다고 볶아대기도 했지만 일이 끝나면 가족처럼 대했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하나 밖에 없는 손주인 나에게는 장난도 많이 쳤다. 창호지에 대나무를 붙이며 연을 만들어 주셨고 외출했다 돌아오실 때면 호떡같은 간식을 사오셨다.

번창하던 사업은 농협 유통망이 막히면서 암담해졌다. 농협은 자체 생산을 계획했고 하루 아침에 거래처가 끊긴 여파에 위기가 찾아왔다. 할아버지로부터 일을 넘겨 받았던 아버지는 자신 대에서 닥친 위기에 크게 낙심했고 젓갈사업에서 마음이 멀어지는 듯 했다. 점차 양어장 사업으로 눈을 돌리셨고 급기야 서울서 대학을 졸업하고 스포츠센타에 근무하던 광호씨를 고향으로 불러내렸다. 둘은 양어장과 멸치젓갈 사업을 번갈아 가며 했다. 쉬이 일어서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에게 아들은 큰 힘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제일식품 알배기 멸치젓`의 맛을 기억하는 개인과 대형시장 상인들이 다시 주문을 해왔고 멸치사업은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광호씨는 예쁜 각시와 결혼을 하고 은준, 승준 두 아들도 얻었다.

“몇 년 전 소금이 그야말로 금값일 때가 있었지요. 돈이 있어도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때 어쩔 수없이 중국산 소금을 쓴 적이 있었지요. 그해엔 완전 실패였습니다. 멸치젓갈의 맛은 좋은 멸치와 좋은 소금만이 답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저는 오래된 재래식 간독이 우리 `제일식품 알배기 멸치젓`의 맛을 보탠다고도 생각해요.”

광호씨네 집에서는 음식에 간장 자체를 쓰지 않는다. 액젓을 다려서 보에 거른 뒤 병에 담아 나물도 무쳐먹고 미역국도 끓인다. 그는 젓갈의 고유한 맛을 바탕으로 재탄생 되는 새로운 상품에 대한 시도를 꿈꾼다. 좀 더 너른 부지를 마련해 공장을 짓고 싶다. 오래된 간독이 너무나 소중한 보물이지만 재래식 방식에 현대적인 시설을 접목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권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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