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세월 너무 끔찍
한숨인 듯 노래인 듯 옛날 옛적 이야기

전촌교로 쉼 없이 차량이 지나간다. 다리 아래 천막을 치고 둘러앉은 노인들이 세월아 네월아 윷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곳은 한 여름에는 시원하니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요, 누구나 오다가다 아무 때고 들러도 동무가 기다리는 놀이터다. 대부분 조상대대로 전촌리에서 살아 온 터라 슬그머니 다가앉아 툭 건드리기만 해도 옛날 옛적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온다. 지독한 가난이, 파란만장했던 젊음이, 굴곡 많은 시대가 영상처럼 흐른다.

“옛날에는 신랑 각시 둘이 만나 얼라들 예닐곱은 우습게 낳았지. 열을 낳으면 한 섬을 낳았다고 했어. 아이고, 그 많은 식구에 먹을 거는 없고 거지는 또 얼마나 많았던고. 나무다리 밑에서도 살았고 추운 날엔 짚낱가리에서 자다가 얼어 죽는 일도 숱했다. 옷에 솜을 넣어 입는 사람들은 몇 안 되는 부자였지. 대부분은 광목을 끊어다가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봄, 여름은 물론이요 겨울에도 그걸 입었으니 얼마나 추웠겠노. 또 삼이라 부르는 대마초를 심어 베옷을 지어 입기도 했어. 얼마나 까끄러웠다고. 그리고 우리 조모는 그 삼으로 술도 담갔는데 동네사람들이 맛 좋다고 난리도 아니었지”

열악한 환경은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쉬이 앗아갔다. 못 먹어 허약했고 병이 들면 고칠 재간이 없었다. 한 집에 아이 한 둘 잃는 것은 예사였다. 그땐 마치 하얀 리본을 달아 놓은 것처럼 꼬리 끝이 흰 여우들이 많았다. 애장이라고 해서 산등성이에 대충 구덩이를 파고 죽은 아이를 묻으면 여우가 내려와 파먹기도 했다. 여우로부터 아이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독에 넣어 돌로 덮고 가시나무를 얹기도 했지만 들에서 일을 하다보면 여우가 파 온 아이의 시체를 우둑 세워 놓기도 했다.

전염병이 돌면 줄줄이 죽어 가마니에 덮여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타 동네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새끼줄을 치고 보초를 섰다. 집집마다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놓고 박으로 만든 바가지를 문대는 소리가 밤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행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약한 인간이 명마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한 마음은 그토록 간절했다. 전염병이 어린 새끼의 목숨을 앗아가면 파묻지도 못하고 병이 다 지나갈 때까지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땅에 묻으면 마을 아이들이 모두 죽는다는 생각에서였다. 병이 다 지나가면 그때서야 아이를 땅에 묻었다. 언제 무엇으로부터 잃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대부분 아이들 출생 신고를 세 살이 지난 후에 하곤 했다. 그 와중에도 목숨을 연명한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자랐다.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따 먹고 잡아먹고 천지도 모르고 그렇게 컸어. 겨울이면 장치기를 했지. 논에 물이 꽁꽁 얼면 얼음 위에서 기다란 작대기를 하나씩 들고 뺑 돌며 장을 쳤는데 외국 놈들이 하는 아이스하키를 실제로는 우리가 먼저 한 셈이야. 암만 우리는 역사가 100년도 넘을 걸? 제기도 찼지. 엽전을 넣고 한지를 가지고 야무지게 만들었지. 찔찔 흐르는 콧물 닦아가며 세월 따라 나이를 먹었어”

그토록 가난했던 시절을 지나 인구가 불고 변화가 온 계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어부들의 후리배 사업 여파였다. 정어리와 멸치 떼가 유난히 많이 몰려오던 감포 항구에서 일본인들은 고기를 잡고 공장을 세웠다. 양쪽에 15명 씩 30명 남짓이 힘을 합해 끌어올리던 후리배는 돛대가 세 개나 달린 40자가 넘는 규모로 많을 때는 열 척이 넘게 조업을 했다. 포구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끓었고 그 중 절반은 외지 사람들이었다. 후리배 사업이 천석꾼보다 낫다는 말이 돌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 사업은 일본인이 했지만 일꾼은 조선인을 썼다. 뱃일을 하려고 외지사람들이 몰려왔고 그들이 자리를 잡은 마을을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새마을이라 불렀다.

후리배 일로 살림이 늘지는 않았지만 환경의 변화는 분명 있었다. 말이 다니던 길에 번듯한 도로가 생기고 일본인 가옥들이 생겼다. 상가가 늘고 새로운 물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인 업자들이 감포 바다의 자원을 수송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부랴부랴 맨몸으로 감포를 떠났다. 그들의 재산은 그것을 관리하던 조선인들에게 넘어왔다.

6.25 전쟁이 끝나고 얼마가 지났을까. 사룡굴 근처 바다에 간첩이 든 적이 있었다. 마을 사람이었던 그는 혼자 와서 몰래 아이 하나를 데리고 바위에 숨어 있다가 북에서 온 배를 타고 갔다고 했다. 지금도 해안 곳곳에는 군인들의 초소가 남아있고 그들이 낸 좁은 길로 가랑잎이 폭신하게 쌓이고 있다.

“암, 달라져도 이만 저만 달라진 게 아니지. 공원에 선 말 동상 봤지? 거기 공원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제법 와. 경주시에서 지정한 회단지거든. 낚시꾼들도 오고 낚싯배도 많지. 우리 아들도 횟집을 하는데 여기 회가 맛이 참 좋아”

“주름진 달걀에 모가 있나 방구에 뼈가 있나 구름에 주소가 있나 바람에 번지가 있나 여자 코고무신에 왼쪽이 있나 오른쪽이 있나”

최두원(80)씨는 문득 흥에 겨운 리듬을 타며 노래 아닌 노래를 읊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마치 소년처럼 웃었다. 빼곡하게 적힌 세월의 노래가 들려왔다. 긴 방파제 끝에 선 등대 너머에서 저녁이 오는 듯 했다.

`해마다 피는 들국화는

붉은 꽃 노란 꽃을 피우며

아름다운 자태를 피우건만

해마다 닥쳐오는 인생길은

늙기만 하는구나.

좋아했던 사람도

미워했던 사람도

모두가 떠나고 저한테도 왔노라

싸우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모두가 간 세월 속에 재미스럽게 살다가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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