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랑 건너면 경주, 두원리 아낙 40여년 묵은 빛바랜 기억

“낯설었데이. 밥을 묵을 때도 부끄러웠고 아가씨 때는 가마솥에 밥을 해도 잘 되더니만 시집 와가 밥을 하이 죽밥이 되기 일쑤인기라. 아이고, 생솔갑을 쳐다가 불을 때가 보리쌀 씻어 안치면 연기는 또 을매나 맵던고. 눈물 콧물 질질 짜며 삼 시 세 끼 밥을 했지”

동해안로 2714번 길은 거랑 하나 사이로 경주시 감포읍 연동과 포항시 남구 장기면 두원리가 나눠진다. 수년 전 복개로 얼핏 보면 한 마을처럼 보이지만 마주보는 집의 전화번호 국번도 마을이 치르는 행사도 다르다. 연동에서 두원리로 시집을 오면 엎어지면 코 닿을 듯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경주서 포항으로 시집을 온 셈이다. 그렇다고 인심까지 선을 긋고 사는 것은 아니다. 바다도 들판도 함께 경작하고 경조사에 마음 나누며 오순도순 살아간다.

연자방아 암수가 떠억 하니 자리 잡은 집. 국화 봉오리가 소복한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매화씨(62), 명자씨(68) 정자씨(67)가 둘러앉아 망중한을 즐긴다. 멸치를 삶아 선별 작업을 마치고 건조기에 넣은 뒤다. 두원리 앞바다에 멸치 떼 신나게 노닐면 사내들은 새벽 배를 밀고 나가 그물을 풀고는 돌아오는 배 위에서 “물 끓여라.” 전화를 건다. 설사 비 쏟아지는 아침이라도 아낙들은 장작불을 때어 커다란 솥에 물을 끓인다. 예전에는 버리는 게 많았다. 수시로 하늘을 바라보고 날이 궂으면 방에 불을 넣어서라도 멸치를 말려야 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언제고 건조기에 넣으면 맛좋게 절로 마른다. 크기에 따라 볶아 먹는 것, 안주로 찍어 먹는 것, 국물을 내는 것을 구분하고 아주 굵은 멸치는 젓갈을 담갔다. 옹기에 멸치를 담아 품질 좋은 소금에 재고 한지로 주둥이를 덮어 풀을 쑤어 봉했다. 동짓달부터 이듬해 시월까지 보관했다가 곰삭은 젓갈을 거르곤 했는데 숙성이 잘 된 것은 바알가니 맛도 좋고 색깔이 고왔다. 내리 5년을 두고 먹어도 전혀 맛이 변하지 않았다.

매화씨가 한 살 많은 동네총각과 결혼을 할 때만 해도 두원리는 온통 초가집이었다. 거랑은 물이 맑아 밤이면 위쪽에선 남자들이 아래는 여자들이 목욕을 했다. 간혹 고된 시집살이에 부아가 차오르면 빨래 방망이로 퍽퍽 두들기며 빨래를 했다. 바닷일에, 밭일에, 집안일에 둘둘 말려 흘러온 세월이 주름만 잔뜩 슬어 놓았지만 마음속엔 추억이 새록새록 산다.

“낯설었데이. 밥을 묵을 때도 부끄러웠고 아가씨 때는 가마솥에 밥을 해도 잘 되더니만 시집 와가 밥을 하이 죽밥이 되기 일쑤인기라. 아이고, 생솔갑을 쳐다가 불을 때가 보리쌀 씻어 안치면 연기는 또 을매나 맵던고. 눈물 콧물 질질 짜며 삼 시 세 끼 밥을 했지”

두원리 아낙들은 그렇게 두루두루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고 집안도 되었다. 시누이도 되고 올케도 되고 한 사십 년 푹 눌러 산 시골에는 남이 없다. 아이들은 책보를 매고 신작로를 걸어 계원초등학교에 다녔다. 차가 없던 시절에 어쩌다 공짜 차를 얻어 타면 좋아서 난리가 났다. 아침에 날고구마를 들고 학교에 가다가 자갈길 가에 소복이 흙을 덮어 감춰 놓고 하굣길에 그걸 꺼내 바닷가로 달려가 종일 놀곤 했다.

“정월대보름이면 마을 복판에 금을 긋고 크다란 줄로 댕겼지. 여자, 남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마캐다 나와 줄당기고 나면 명절 음식으로 차리 놓고 술을 받아 종일 놀았다 아이가. 그라고 음력 시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묘제를 지냈데이. 과일캉 음식캉 차리 놓고 절하고 나믄 얼라들이 책가방 울러 매고 떡 받아 묵을라꼬 산등성이를 막 기 올라왔다. 그라믄 니 아 내 아 할 것 없이 쭐루리 줄을 서라카고 한 쪼가리썩 떡을 나눠줬재.”

결혼은 동네 잔치였다. 이장 집에 보관했던 족두리, 장옷을 빌려서 쓰고 술잔, 그릇들은 혼사를 치르는 집에서 대부분 준비했다. 수탉과 암탉을 붉고 푸른 천으로 각각 싸서 탁자 위나 아래에 놓았다. 수탉의 울음소리는 밝고 신선한 출발을 의미하고 또한 혼례날 찾아오는 그러나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악귀를 쫒는다는 의미였다. 또 전통 농경사회에서 중시하였던 다산(多産)에의 희망도 담겨있었다.

“우리 형부가 부산 사람인데 말이지. 시내 사람이다 보이 장가오는 신랑에게 잿봉지를 던지는걸 몰랐던 기라. 동네총각들이 재를 봉지에 담아가 말을 타고 오는 새신랑에게 던지니까 재를 보얗게 덮어 쓰고는 마 눈도 몬 뜨고 서가 이래 말하데. “촌놈은 촌놈이다. 이게 사람이 하는 짓인가. 지금 짐승이 들어온다고 이래 두드리는가?” 승질이 나도 처가 동네니 욕도 몬하고…. 그기 한 마디로 동네 총각들이 지들 동네 각시를 데불고 가는 신랑과 얄궂은 얼굴트기를 한 셈인기라.”

초상이 나도 온 동네 사람들이 움직였다. 상을 당한 집이 하얀 윗저고리를 지붕에 얹어 놓으면 `아, 저 집에 초상났구나.`는 신호였다. 정작 가족들은 슬픔에 빠져 경황이 없기 때문에 이웃들 친척들이 절차 밟아 입관하고 산에 묻는 것까지 다 해주었다. 3일 장부터 4일, 5일 장까지 있었는데 주로 3일장을 치렀다. 상여를 메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요령을 흔들었다. 만장을 들고 산으로 가는 행렬과 요질과 교대를 두르고 상여 뒤를 따르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배웅이었다. 아침 일찍 올라간 사람들이 땅을 파놓으면 먼저 산신을 위해 산신제를 올리고 시신을 묻었다. 그리고 난 뒤에 고인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사람 하나를 보내는 일에도 온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그날 덮은 봉분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내려오던 사람들.

“아이고, 상여 집을 지나갈 때는 와 그리 무섭던고. 내는 지금도 논으로 밭으로 갈 적에 뻘건 줄 퍼런 줄 보믄 마 발이 빨라진다. 내 발소리에 내가 놀라가 퍼뜩 지나간데이. 그라고 거그가 뱀이 많다는 소문도 있았다.”

매화씨, 명자씨, 정자씨. 두원리 호쾌한 아낙들이 바랜 책장을 넘기듯 술술 기억을 풀고 있다. 대문 옆 굵은 은개나무도 연자방아 위에 앉은 청개구리도 마당에 널어놓은 붉은 고추도 귀를 열고 듣는다. 권선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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