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15일 아침 서울 시내 각처에는 `금일 정오 중대방송, 1억 국민 필청`이라는 벽보들이 나붙었다. 소수의 식자층은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방송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여기 충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정오 무렵,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이 전해졌다. 1910년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1939년 7윌에는 노구교사건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했던 일본. 급기야 그들은 히틀러, 무솔리니와 손잡고 1941년 12윌8일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일본은 서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1945년 5윌7일 나치스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선의 한 축이 무너지면서 패색이 짙어졌고, 7월17일 포츠담에서 미, 영, 소 3개국 대표는 힘을 집결키로 합의했다. 8월 6일과 9일에 미국의 폭격기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세례를 퍼부었고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가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4년을 끌던 태평양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 날, 포항 동남쪽 포구 구룡포는 정적이 감돌았다. 일본인 가옥은 문을 굳게 닫았고 조선인 역시 만세를 부르며 뛰쳐나오는 이가 없었다. 이틀이 지난 어느 밤, 한 집에 네댓 명씩 모여 있던 청년들 중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에이, 마캐 나가자. 나가서 딥다 소리를 질러야 안켔나.” “그래 좋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루루 몰려나갔다. “만세~ 만세~” 큰 소리로 목청을 높이며 굳게 입 다문 일본인 거리를 뛰었다.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삼십 명씩 무리를 이뤄 부르는 만세소리와 축항을 치는 파도소리가 늦여름 밤을 흔들었다.

그 중에는 앞이 안보이는 봉사도 있었다. 그가 무리를 따라 창주공립보통학교 부근 로터리부터 축항까지 따라 뛰는 모습에 일행들은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징을 치며 따라오는 노인도 있었다. 저녁마다 외치던 만세소리는 일주일가량 계속 되었다.

포구에는 일본인의 짐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구룡포항을 통해 본국으로 가려고 몰려든 내륙사람들은 식솔들을 데리고 일본인 집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구룡포 사람들은 그들의 재산을 뺏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자국으로 돌아가는 그들에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챙기라고 했다. 수개월에 거쳐 운반선이 닿는 대로 그들은 떠났다. 일본인 중에는 죽어도 구룡포를 떠나지 않겠다던 노부부가 있었다. 아이가 없던 그들은 이곳에 살게 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조선인들이 돌아가라고 해서 억지로 돌아갔지만 얼마 후 다시 구룡포를 찾아왔다. 그러나 결국 정착하지 못하고 쓸쓸히 구룡포를 떠났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바다를 건너 구룡포에 발을 딛었던 일본인들은 50여 년 동안 이루고 쌓았던 유토피아를 그렇게 놓아야 했던 것이다.

“패전 소식으로 마을 전체가 어수선 했습니다. 급하게 철수하는 어선에 오르느라 짐을 제대로 챙길 수도 없었지요. 구룡포 항을 떠나자 배가 표류하기 시작했습니다. 8월 말에서 9월 초순 사이였어요. 기상이 매우 나빠 파도가 높았고 바람도 거칠게 불어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불안에 떨었습니다. 이러다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표류하다가 시모노세키에 겨우 도착한 우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1931년 구룡포에서 태어나 1945년 패전으로 떠난 이시하라 히데오. 15살의 이시하라는 어머니의 친척이 갖고 있던 배를 타고 구룡포와 작별했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가져올 물건도 없었다. 부모님은 구룡포가 제2의 고향처럼 살 곳으로 알았으므로 특별히 값어치 나는 것을 간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 거처할 집이 없어서 담배창고 한 쪽에서 기숙을 했다. 식량이 부족해 얻어먹었다.

귀환할 때 손꼽히는 부자로 살던 하시모토 젠키지의 막내딸 하시모토 히사요. 그녀는 가족과 헤어져 홀로 배를 탔다. 일행이 모두 가가와현 사람들이라 잘 보살펴 주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았다. 씻지 못해 꾀죄죄한 모습이 거지꼴이었다. 뒤늦게 오다에서 이뤄진 아버지와 어머니의 재회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눈물바다 였다.

도가와 야스브로의 아들 카오루가 쓴 회고사는 당시 상황을 더욱 상세히 보여주었다. `전쟁의 상황은 나빠졌다. 미군기가 구룡포 상공에도 자주 나타나 정박 중인 어선에 총을 쏘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바닷가에는 조난당한 병사의 사체가 떠밀려 오는 일도 잦았다. 북한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과 내륙으로부터 돌아오는 귀환자가 쇄도했다. 구룡포 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귀항하기 위해서였다. 고향을 떠나있던 구룡포 사람들도 돌아왔고 그 사이 조선인들로 구성된 <조선자치회>가 조직돼 활동을 하는 등 거리가 갑자기 붐볐다. 9월이 되자 현저하게 사람들이 줄었다. 남은 것은 치안관계의 주재소장을 비롯하여 몇 안 되는 사람 뿐이었다. 조선자치회가 배를 준비해 귀환하라는 요청을 했다. 그때 나와 오노 슈윤이치 두 사람을 빼고는 모두 구룡포 항구를 떠났다. 나와 오노는 우리가 태어난 땅에서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담배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10월이 되자 심상소학교에 주둔해 있던 미군이 우리를 소환했다. 미군은 나와 오노를 즉시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부산으로 갔고 부산항 부두에서 인양선 메이유호에 인도됐다. 그 배를 타고 처량하게 일본으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까? 그들은 일을 봐주던 집사나 가까웠던 이웃에게 맡겼다. 훗날 그들은 일본인들이 하던 일을 자연스럽게 이어 받았다. 누구 하나 간섭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은 구룡포 사람들 사이의 빈부차이를 넓혔고 신분 변화를 가져왔다. 느닷없는 시대적 변화에 올라 탄 사람들은 급속히 부를 축적해 구룡포의 신진 세력으로 부상했지만 대다수 서민들은 일본인들이 거주할 때나 그들이 돌아간 뒤에나 똑같았다. 새롭게 변화할 여건도 구실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구룡포를 떠난 지 6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갈피마다 먼지처럼 앉은 이야기들이 여전히 수런거리고 있다. <끝>

* 이 글은 2009년 3월, 소설가 조중의씨와 필자가 공동 집필하여 발간한 `구룡포에 살았다(도서출판 아르코)`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권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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