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전작라(門前雀羅)

문 앞에 참새떼가 놀고 새 잡는 그물이 쳐졌다. 방문객이 끊어져 한산한 상태를 말한다. 문전성시(門前成市)나 문전여시와 상대 되는 말이다.

사마천은 사기의 `급정열전`(汲鄭列傳)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한 무제 때 구경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급암과 정당시는 모두 체면을 지키며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로서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극진히 대접할줄 알았다.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있을 때에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귀천을 가리지 않고 반겼으며 항상 겸손했다. 따라서 그들의 집 문 앞은 항상 방문하는 손님들로 부산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벼슬길은 모두 부침(浮沈)이 심했다. 급암은 소탈한 성격의 인물로서 항상 솔직한 말로 임금에게 간언을 했으므로 결국 무제의 미움을 사서 중앙관직에서 밀려나 멀리 회양군의 태수가 되기도 했다. 정당시 역시 자기가 돌봐준 사람의 죄에 관련되어 서민이 됐다가 나중에는 여남군 태수로 끝을 보았다. 두사람은 벼슬자리에서 물러났을 때는 집안조차 가난했으므로 찾아오는 사람이 날로 줄어들어 결국에는 아무도 방문하지 않게 됐다 사마천은 이 급암과 정당시의 전기를 쓰고 난 뒤 그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대개 급암 과 정당시 같은 현인이라도 세력이 있을 때에는 손님이 열 갑 절 은 됐지만 힘이 없어지면 모두 떠나가 버린다. 하물며 보통 사람에 있어서랴. 또 적공의 경우도 그가 정위의 벼슬에 있을 때에는 그 방문객이 문 앞에 넘쳐 부산스럽기 그 지 없었다. 그가 벼슬을 떠나자 방문객은 끊어져 문 앞에는 참세떼가 모여들어 새를 잡는 그물을 문앞에 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적공이 다시 정위 벼슬을 하게 되자 방문객은 다시들끓게 됐다. 그를 본 적공은 대문에 다음과 같이 크게 써붙였다. “한번 죽고 한번 살게 됨에 사귐의 정을 알고 한번 가난하고 한번 부자가 됨에 사귐의 실태를 알며 한번 귀하고 한번 천하게 됨에 사귐에 정을 알 수 있다네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랴” 이로써 문전작라 라고 하면 가난 하거나 세력이 없어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경우를 뜻하게 됐다. 또는 그저 쓸쓸하고 한산한 상태를 말할 때에도 이 말이 쓰인다. 인간의 간사함에 나를 돌아 본 다. 권력 앞에는 인간의 인격은 없다. 우정과 의리를 찾아 길을 나서자.

/쌍산 김동욱

한국서예퍼포먼스협회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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