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

스산하다. 낡은 목조 건물들이 이마를 맞대고 휘어지는 골목, 부서질 듯 위태로운 처마의 모서리가 후지산 문양이 박힌 나무 발코니를 내려다보고 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2층의 창들은 이제 삐걱이지 조차 못한다. 100여 년 전으로 세월을 돌리면 이곳은 목욕탕과 이발소, 세탁소, 약국, 사진관, 잡화점 등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곳, 여관과 식당, 선술집 그리고 기생들을 고용한 고급 요정들이 밀집해 있던 향락의 거리였다. 고기가 많이 잡히는 성어기에는 도처에서 몰려 온 일본 뱃사람들로 밤낮없이 북적였다. 낮에는 항구를 중심으로 선주와 어부, 운반업자들이 어깨가 받칠 듯이 붐비고, 밤이면 노랫가락과 술타령, 기생들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로 뒷골목은 날이 새는 줄 몰랐다. 오랫동안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 온 어부들이 유흥을 즐기던 석정정(石井亭), 안성정(安城亭), 한양루(漢陽樓), 이엽정(二葉亭), 영해루(迎海樓) 등 숱한 요리집들은 당시의 모습을 담은 바랜 사진 속에 호사스럽던 날들을 가두고 있다. 웃음을 팔던 작부들도 호기롭게 요리집의 문을 열어 젖히던 어부들도 오래전 먼 세상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이 낳아 기르던 아이들도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 이미 생을 마쳤거나 백발이 되었다. 파란의 시대를 흘러 온 황량한 골목은 이제 길가에 나와 앉은 백일홍 화분과 묶인 개가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가다 쉬다를 반복하는 동안 골목 끝에서 비린 바람이 불어왔다.

골목길 돌아서면, 10번 변한 추억이 아련히…

경사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오른 구룡포 공원, 호국 영령을 모시고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충혼각과 충혼탑, 그리고 용왕당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조금만 둘러보면 움찔움찔 일어서는 왜색적인 풍경들. 공원 뒤에는 오래전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던 심상소학교가 있다. 앳된 일본인 처녀 선생을 기억하는 늙은 은행나무가 선 교정은 훗날 구룡포동부초등학교로 운영되다가 지금은 폐교가 되었다. 오른쪽 둥그런 공터에는 비취빛 규화석으로 된 일본인 송덕비가 7미터 남짓한 규모로 우뚝 서 있고, 충혼탑 뒤편에는 신사에 들기 전 손을 씻는 데미즈야가 기우뚱하게 놓여있다. 또 버려진 듯한 석불상도 하나 있는데 `부동명왕(不動明王) 대정(大正) 6년`이라 새겨져 있다. 그런가하면 공원 입구 좌우에는 코마이누 한 쌍이 앉아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공원에서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는 일본풍의 건물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남아있었다. 해방 이후 구룡포 성당의 공소로 쓰인 탓에 마당에 성모상이 서 있었지만 지붕을 비롯한 외형은 누가 보더라도 일본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신사라고 불렀다. 후에 신사가 아닌 불교 진언종 소속의 `본원사`라고 밝혀졌으나 2년 전 마을 주민들이 허물어 지금은 텅 빈 마당에 때낀 성모상 만이 남아있다. 또 공원 바로 옆집 대나무 숲에는 아직도 신사의 제주 사카이 어머니 무덤도 있다.

그들이 이곳을 떠난 지 7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조선 팔도 구석구석 왜국의 잔해에 상처입지 않은 곳 몇이나 되랴마는 대부분은 세월이 지우고 덮어버렸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포구 구룡포의 한 귀퉁이는 소멸되지 않고 버티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 아픔과 혼란의 시대가 남긴 이야기들이 바람이 불면 씁쓸하게 골목을 흘러 다닌다. 몰려 온 사람들과 밀려 난 사람들이 공유했던 역사 속 구룡포. 비록 가난했지만 평화롭고 아름답던 어촌이 이방인들의 등장으로 겪었던 변화와 혼돈, 그리고 이곳에 생의 터전을 부리고 살다 패전과 함께 돌아간 일본인들의 삶이 후미진 곳마다 아슬아슬 고여 있다. 혹시라도 못다 전한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 가가와현 사누키시 시토쵸에서 발간한 `시토정사`에는 `1909년 하시모토 젠기치가 구룡포로 이주해 매제인 우에무라와 공동으로 성어 운반업을 했다`고 쓰여 있다. 또 오카야마 현 와케군 히나세쵸에서 발간한 <히나세정지>에 `포항은 청일전쟁 이전부터 잠수기업의 근거지로 1903년 돗토리 현 어부가 처음 내항하여 개발됐고, 1908년 오카야마 현 어부들이 포항에 이주어촌을 건설해 어업에 종사했다`라고 쓰인 걸 보면 그들은 포항 이주 이후에 구룡포에 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일제 식민지배기를 1910년부터 1945년까지로 보는 일반적 견해에 의한다면 일본인 어부들의 구룡포 진출시기는 보호국체제 아래에서나마 대한제국의 주권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이미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작은 포구까지 들어와 한 세월 풍미하던 사람들, 그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왜 이곳을 택했고 무엇을 하고 살았으며 어떻게 떠나갔을까?

100여 년 전 처음 구룡포를 찾아 온 사람들은 일본의 4개 섬 가운데 가장 작은 시코쿠의 북쪽 가가와현(香川縣) 어부들이었다. 상식적으로라면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 동해와 가장 가까운 혼슈와 주코쿠의 북서쪽 해안에 살던 어부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목선을 타고 구룡포를 찾아 온 어부들은 멀고 먼 일본 세토내해 연안의 가난한 어부들이었던 것이다.

통어를 다니던 1세대는 어업활동이 번창하고 포구에 사람이 들끓자 서서히 구룡포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산업자와 선원,각종 사업장에서 일하는 잡부들을 상대로 상인으로 신분을 바꾸었다. 일부는 선박 경영과 선어 운반업, 통조림 가공공장 운영으로 큰 부자가 되기도 했다. 단기간 내에 놀랍도록 변화하는 신분은 당시 구룡포 인근해의 풍성한 어자원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처음 그들은 구룡포 주민들이 살지 않았던 북동쪽 산비탈에 거주지를 잡았으나 서서히 축항을 건설하고 모래사장을 매립하여 지금의 거리에 하나 둘 가옥을 지어갔다. 고기잡이로 얻는 수입이 늘자 가족이 늘고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을 취급하는 부대시설이 생겨났으며 업종이 다양해지면서 거리는 나날이 번창했다. <계속>

*이 글은 2009년 3월, 소설가 조중의씨와 필자가 공동 집필하여 발간한 `구룡포에 살았다`(도서출판 아르코)>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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