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3> 이국의 바다에 꿈을 걸었다<2> / 포항 구룡포항 외국인 선원들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3> 이국의 바다에 꿈을 걸었다<2> / 포항 구룡포항 외국인 선원들
  • 윤희정
  • 등록일 2011.08.07 20:57
  • 게재일 2011.0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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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서 첫 배 타고 많이 맞고 많이 울어
포항서 동포 친구와 맘 따뜻한 사장 만나

3년 만에 한국 돈

2천만 원 정도 벌었어요.

돌아가서 집 사고 땅 사고

할 정도는 안 되지만

그래도 나아졌어요.

월급을 통장에 모아두었다가

환율 변동에 따라 고향에 보내요. 아들은 이제 5살,

딸은 10살 되었어요.

4년 동안 두 번 고향 다녀왔어요. 돌 지나고 떠나온 아빠를

아들은 몰라봤어요.

안기려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딸은

아빠 많이 기다렸다며 반겼어요. 사진 보며 자란 모습 생각해요.”



봄부터 청어 비늘 마를 새가 없는 포구다. 만선으로 돌아 온 배들이 모야를 삐또에 걸면 중매인들의 한바탕 경매가 눈부신 아침을 연다. 뜰채가 터지도록 청어를 떠올려 트럭에 풀면 가공 공장으로 축양장으로 향하는 길은 또 하나의 비린 바다가 된다.

국내에 외국인 선원 신분으로 들어온 이들 대부분이 배를 타지만 일부는 가공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장위습(35)과 류보리(32)는 포항시 남구 구룡포에 있는 주영수산(사장 김재환)에서 일하는 중국인 근로자다. 둘 다 2007년에 한국에 들어와 계약한 3년 근무를 마치고 다시 연장을 했으니 4년 가까이 근무한 셈이다. 내년 6월이면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들. 그들은 트롤선이 드는 포구 곁 공장에서 이국의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하남성이 고향인 장위습은 택시 운전을 해서 모은 돈으로 선원송출회사를 통해 한국에 왔다. 처음 닿은 곳은 남해 통영, 꽃게잡이 배를 탔다. 그 배에는 한국선원 9명과 중국인 선원이 2명 있었는데 가혹행위가 심했다. 무엇보다 손발이 맞아야 하고 쉼 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뱃일. 연습이나 차차 익숙해 가는 과정은 생략된 채 곧바로 조업 현장에서 몫을 해내야만 했다. 낯선 뱃일의 육체적 어려움은 뒷전으로 치더라도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큰 벽이었다. 말을 잘 듣고 싶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절박한 환경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성격은 불같았고 욕설과 주먹이 소통의 전부였다. 답답하고 억울했다. 견디다 못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면 싸움은 더욱 커졌다. 참 많이 맞았다. 많이 울었다. 눈물이 늘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었다. 망망한 바다, 어디를 둘러봐도 의지할 곳은 없었다.

도저히 못 견디고 결국 4개월 만에 배에서 내렸다. 한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장위습도 따라 가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올 때 품었던 꿈과 투자한 돈이 아까워 돌아갈 수 없었다. 가족과 이별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던 때가 생각났다. 몇 년 만 죽어라 고생하면 형편은 나아지리라 꿈꾸며 왔다. 이렇게 돌아가면 남은 생 내내 좌절이 더 클 것 같았다.

장위습은 회사를 통해 다른 곳으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또 다시 만날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으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온 것이 주영수산. 주영수산은 배도 여러 척 가지고 있었고 가공 공장도 있었기에 자신이 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인상 좋은 사장은 설움에 절어 초췌해진 그를 따뜻하게 받아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주영수산에는 류보리를 포함한 10명의 중국인 친구들이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처지가 같았고 무엇보다 말이 통했으므로 쉬이 친해질 수 있었다.

계절 따라 취급하는 어종은 다르지만 작업은 끊임이 없다. 봄이면 포구에서 실려 온 청어를 깨끗이 씻어 상자에 담고 포장한 뒤 냉동 창고로 나른다. 여름부터 오징어잡이가 시작되면 할복 작업을 하고 덕장에 널고 걷고 반복하며 가을을 맞는다. 겨울이면 과메기 작업으로 눈코 뜰 새가 없다. 보통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을 하지만 일거리가 넘쳐나면 잔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 몸을 쓰는 일이라 고되다.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그러나 일을 마치면 함께 할 수 있는 친구가 있고 언제나 가족같이 보살펴 주는 사장 내외가 곁에 있다. 공장 맞은 편 건물 5층에 마련해 준 숙소로 퇴근해서 중화방송을 보고 컴퓨터로 가족과 소식도 주고받는다. 명절이면 일감을 놓고 며칠이나마 휴식을 취한다. 고향에서 요리사로 일했던 류보리는 언제나 맛있는 중국 음식을 차려낸다.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외로움이다.

“3년 만에 한국 돈 2000만 원 정도 벌었어요. 돌아가서 집 사고 땅 사고 할 정도는 안 되지만 그래도 나아졌어요. 월급을 통장에 모아두었다가 환율 변동에 따라 고향에 보내요. 아들은 이제 5살, 딸은 10살 되었어요. 4년 동안 두 번 고향 다녀왔어요. 돌 지나고 떠나온 아빠를 아들은 몰라봤어요. 안기려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딸은 아빠 많이 기다렸다며 반겼어요. 사진 보며 자란 모습 생각해요.”

예전에 비해 외국인 선원들을 대하는 인식이나 환경은 한결 따뜻하다. 선주들이나 선원들 서로가 `살이`에 대한 힘겨움을 이해하고 기대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라 아직도 일부 선원들의 불명한 행방에 선주들이 곤혹을 치르는 일도 허다하다. 그 사연이야 가지가지겠지만 열악한 임금에 대한 불만과 일확천금에 대한 허상이 대부분일 것이다. 허탈하고 난감하지만 구석구석 숨어든 그들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불법 체류자로 떠돌다가 단속에 걸리면 강제추방을 당하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장위습과 류보리는 며칠 후 함께 휴가를 간다. 이번에는 스무날 남짓한 시간을 얻었다. 장위습의 어머니가 폐암 수술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장은 수술 과정을 지켜보고 오라며 넉넉한 시간을 주었다. 함께 떠나는 류보리 역시 장위습과 함께 돌아오라고 같은 시간을 허락했다. 장위습은 아내에게 줄 화장품을 사 두었고 류보리는 8살 딸에게 줄 과자와 사탕, 초콜릿을 모아 두었다. 어린 딸에게는 아빠가 한국에서 사온 선물을 자랑하며 한동안 보낼 즐거울 시간이겠다.

“오늘 만두 만들어요. 밀가루, 부추, 만두 빚어요. 이모도 같이 먹을래요?”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을 류보리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모처럼 중국술도 한 병 곁들인 저녁상엔 손수 빚은 만두가 고향을 이야기 할 것이다. 어쩌면 사장님도 끼어 앉아 툭툭 어깨를 다독일지 모른다. 고무호스로 시원하게 물줄기 뿜으며 일터를 정리하는 그들의 등 너머로 발갛게 이국의 여름 노을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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