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막막하고 꿈은 아득해
애절한 망향가 목놓아 부르네

“나는 새우, 대게, 다 잡아요. 새우발이 타면 열흘에서 보름, 바다에 있어요.

“독도도 가봤어요. 아주 예뻤지만 구경 못했어요.

“일 열심히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이 볼 수 없어요. 열여섯 시간 일해요.

“나는 멀미 안했어요. 친구들은 멀미 했어요.

“말 안 통할 때 힘들었어요. 착한 한국 사람 김성원이 많이 도와줬어요.

“그렇지만 약속 안 지키고 돈 빌려 가면 안주는 그런 사람 조금 있어요.”

내항에 정적이 감돈다. 태풍의 기운을 감지한 배들이 스크럼을 짜고 정박해 있다. 용왕대에 걸린 오색 깃발이 서서히 펄럭인다. 나무상자를 꿰매는 포장집도 입을 다물었고 그물을 손질하던 아낙들도 보이지 않는다. 족히 사나흘은 이렇게 숨죽인 채 바다가 잔잔해 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날들임을 포구는 알고 있다.

저녁 무렵, 세왕식육식당 뒷방이 시끌시끌하다. 선주 내외가 회식을 열어주는 모양이다. 선주의 아내가 연신 구운 고기를 선원들 앞에 올려준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띄엄띄엄 한국말로 응대하는 사내 곁에는 저 둥그런 눈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젊은이도 있다. 새내기 선원인가보다. 말 보다 눈짓, 몸짓이 더 크게 오가는 자리다. 소주잔이 서너 배 돌자 그을린 얼굴들이 발그레 물든다. 모처럼 비린 작업복을 벗고 바닷가 소읍의 저녁에 둘러앉은 사람들. 그들은 이국의 바다에 꿈을 건 외국인 선원들이다.

2011년 6월 30일 기준으로 구룡포항내 외국인 선원은 총 227명에 달하며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등 국적 또한 다양하다. 그들의 임금은 월 90만 원에서 98만 원 정도. 노동부를 통해 들어 온 20톤 미만 선박의 선원 69명과 국토해양부를 통해 들어온 20톤 이상 선박 선원 158명이 비슷한 환경에서 일하지만 각자 다른 기관의 법을 적용 받다보니 다소 급여 차이가 있다. 비단 구룡포항 뿐만 아니라 국내 어선에 고용되는 선원중 외국인선원의 비율은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그로인해 어쩔 수없이 발생하는 제도적, 사회적 문제들도 빈번하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새록새록 희망이 피기도 한다.

만성호를 타는 리학봉(35)과 대현호를 타는 마홍위(39)를 만난 것은 구룡포수협(수협장 연규식) 옥상에 지어진 외국인선원 전용 숙소에서였다. 이곳은 외국인 선원들의 주거 안정은 물론이고 어선 입, 출입 시 효율적인 고용관리를 위해 수룡포수협이 2년 전 마련한 곳이다. 연 면적 576㎡ 부지에 숙소 5동과 관리실, 휴게실, 식당 등 부대시설을 갖추었으며 현재 39명이 거주하고 있다. 배 조업상 들고 나는 시간이 불규칙하고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우애를 쌓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다. 게다가 조선족 민용빈씨가 숙소에 근무하며 소통의 상당부분을 해결해 주니 그 또한 기댈 언덕이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인상적인 마홍위는 6살짜리 아들을, 우람한 덩치에 웃는 모습이 순박한 리학봉 역시 두 아들을 거느린 가장이었다. 숙소에 오기 전엔 그들도 선주가 마련해 준 셋방에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장을 보고 요리를 하며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 어쩔 수없는 고립의 시간을 지내야 했던 것에 비해 이곳은 몸과 마음이 편안한 공간인 셈이다. 육지보다 바다에 있는 날이 더 많지만 어쩌다 조업을 나가지 않을 때는 피시방에 들러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고 가끔 노래방에 가서 노래도 한다. 포구의 노래방에는 이제 중국 노래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에서 목줄 세워가며 애타게 부르는 망향가는 얼마나 애절할 것인가.

“나는 새우, 대게, 다 잡아요. 새우발이 타면 열흘에서 보름, 바다에 있어요. 독도도 가봤어요. 아주 예뻤지만 구경 못했어요. 일 열심히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이 볼 수 없어요. 열여섯 시간 일해요. 나는 멀미 안했어요. 친구들은 멀미 했어요. 말 안 통할 때 힘들었어요. 착한 한국 사람 김성원이 많이 도와줬어요. 그렇지만 약속 안 지키고 돈 빌려 가면 안주는 그런 사람 조금 있어요.”

마홍위의 고향은 바다도 있고 농사도 짓는 곳이었다. 어릴 적엔 산으로 들로 소를 몰고 다녔다. 개구쟁이 짓으로 어머니의 속을 썩이던 날도 많았다. 매를 맞고 쫓겨나 집에 못 들어간 적도 있다. 그 모든 게 사랑인 걸 후에 알았다. 청년이 되어 이런 저런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들여 한국으로 배를 타러 왔다. 어머니 이야기에 이르자 그만 눈물이 고인다. 이제 어머니는 세상에 안계시기 때문이다.

“2010년 위독하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고향 달려갔어요. 그러나 어머니 휴가 끝날 때까지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마음 놓았어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일 할 때 어머니 돌아가셨어요. 슬펐어요. 우리 어머니 예뻤어요. 나를 사랑했어요. 내 손 잡아주고 얼굴 막 부벼 주었어요.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두 눈 닮았어요.”

3년간의 계약 기간을 마친 마홍위는 1년 10개월 더 연장을 했다. 그러나 2010년 12월에 들어 온 리학봉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집을 떠나 온지 1년남짓한 그에게는 10살 8살 두 아들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시시때때로 다녀간다. 얼른 돈을 벌어 옥수수와 밀농사를 짓는 아내에게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가서 어릴 적 꿈이었던 가게를 내고 오순도순 살고 싶을 것이다. 그들은 급여를 모두 고향의 가족에게 보내고 간간이 생기는 돈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한다. 고향의 식구들을 생각하면 사치란 없다. 아주 가끔 포항 시내에 나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여행 같은 건 꿈 꿀 수 없다. 이다음에 부자가 되면 그때 아내와 함께 꼭 한국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홍위와 리학봉, 구룡포 바다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태풍이 비껴간 바다가 눈부신 햇살을 부려놓았다. 만성호도 대현호도 엔진소리 세우느라 분주하다. 부식을 담은 상자들과 가스통이 배달되고 커다란 수박도 두어 덩이 실었다. 담배 한 보루씩 받아 든 선원들이 익숙하게 제 자리를 찾는다. 저 배를 타고 나가 사나흘 밤낮 열심히 그물을 걷어 올리고 일렁이는 파도 위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것이다. 그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건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깊어가는 여름, 접시꽃이 발간 얼굴로 그들을 배웅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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