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꼬리 따라 대보~구만리 `새천년길`

2010년 7월 국토해양부는 우리나라 서해, 남해, 동해를 거슬러 아름다운 해안 경관과 지리적 의미를 느끼며 걸을 수 있는 `대한민국 해안누리길`을 선정하고 도보여행기`바다를 걷다, 해안누리길(도서출판 생각의 나무)`를 발간, 적극 홍보에 나섰다. 총 52개 구간 중 하나인 `호미곶 새천년길`은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1리 버스정류장부터 구만리 구봉횟집에 이르는 약 5km 해안길이다. 한반도를 호랑이의 형상으로 볼 때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하여 붙은 이름 호미곶, 꼬리는 방향키 역할을 하며 꼬리에 힘을 줘야 추진력이 생긴다는 의미를 되뇌며 걷는 이 길에는 내내 동해의 힘찬 파도가 동행한다.

구룡포를 지나 대보1리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해송이 있다. 휘어지고 틀어진 그의 몸은 “내 밥 먹고 구만 허릿등 바람 쐬지마라”는 말이 무색치 않게 이곳이 바람 큰 세상임을 말해준다. KBS방송국 송신소와 호미곶면사무소가 있는 언덕을 허릿등이라 하는데 벌판에 대양(大洋)을 북향(北向)해 노출된 지역이라 한풍(寒風)은 물론 샛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곳이라 생긴 말이다. `봄 샛바람에 목장 말 얼어 죽는다` 는 속담 또한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하니 가히 그 바람의 세기를 가늠하고도 남는다.

대일수산과 극동수산을 지나면 멀리 호미곶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호미곶등대는 높이 26.4m, 둘레는 밑부분이 24m, 윗부분이 17m로 전국 최대 규모이다. 1908년 4월 11일에 착공하여 11월 19일에 준공하고 12월 20일에 점등하였으니 100년이 넘는 셈이다. 건립 당시 등대의 명칭은 동외곶등대(冬外燈臺)였으나 1934년 장기갑등대(長기甲燈臺)로 변경됐고 1995년 장기곶등대(長?燈臺)로 2002년 2월 현재의 호미곶등대(虎尾燈臺)로 변경되었다. 등탑 내 천정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오얏꽃(李花文)이 새겨져 있고 출입문과 창문은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의 박공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또 상부는 돔형 지붕 형태에 8각형 평면이 받치고 있으며 하부로 갈수록 점차 넓어진다. 등대 옆에는 국내 유일의 국립등대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등대의 역사를 비롯해 항로표지용품 및 해양관련 자료를 다량 소장하고 있으며 해양수산홍보관과 수상전시장, 야외전시장을 갖추고 있어 학생들의 해양관련 학습장으로도 인기다.

호미곶광장은 등대 외에도 볼거리가 많아 휴식겸 둘러보기에 좋다. 바다와 육지에서 서로 마주보게 설치하여 화합과 상생의 의미를 담은 `상생의 손`과 변산반도 천년대 마지막 햇빛, 피지섬 새천년 첫 햇빛, 그리고 이곳 호미곶 새천년 첫 햇빛 등 세 개의 빛이 합화되어 안치된 불씨는 각종 국제대회 성화의 씨불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우리고장의 해와 달 설화의 주인공인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금실 좋게 마주한 형상과 최근에 완공된 새천년기념관도 수만년 전 지질시대 바다에 살았던 생물체의 화석 2,000여점을 전시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특산품을 파는 난전을 따라 난 바닷길에는 검은 바위들이 많다. 소라나 따개비를 따는 사람들과 파라솔 아래 연인들의 모습이 평화로운 길이다. 왼편에 `청포도`로 유명한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1904~1944)의 시비(詩碑)가 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호미곶과 가까운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원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려 청포도를 지었다고 한다. 시비는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 크기로 육사를 기리는 비문과 청포도 시가 새겨져 있고 주변엔 해송이 자라고 있다. 시 한 편을 소리 내어 읽어본 뒤 다시 걷는 길, 한결 싱그럽다.

호미곶면소재지 입구 오래된 조선소에 배가 한 척 올라와 있다. 예전에는 `군수한테 시집갈래. 배목수한테 시집갈래?`라고 물으면 배목수에게 시집간다 답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던 조선소. 이젠 가끔 드는 배를 수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바다에 삶을 밀고 나아갔던 뱃사람들의 정취는 그대로 남아있다. 해변슈퍼를 지나 호미곶우체국 맞은편 골목으로 든다. 근해자망어선들이 간격을 좁혀 정박한 대보항 풍경이 아름답다. 저 흰 등대와 붉은 등대 사이로 삶이 들락거리는 동안 구성진 생의 가락도 깊어졌으리라.

방파제 교석초포장마차를 지나 까꾸리계에 이르자 붉은 노을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풍파가 심하면 청어가 밀려나오는 일이 허다해 까꾸리(갈고리의 방언) 로 끌었다는 말에서 유래한 까꾸리계. 풍화작용으로 조각된 형상이 독수리 부리를 닮았다하여 주민들이 이름 붙인 독수리바위 너머 석양은 세상의 모든 수식어를 잠재운다. 그 옆 작은 공원에 서 있는 조난비가 멀리 교석초 물등대를 바라보고 있다. 일본이 청일과 러일 전쟁에 승리해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될 무렵, 일본 수산강습소 실습선인 쾌응환호가 해류 어종분포 연해 수집 등 조사를 위해 동해안에 내항하였다가 구만2리앞 해중에서 좌초되어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조난을 당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 후 당시 그 배의 학생과 승무원이었던 사람들이 이곳에 조난비를 세우고 해마다 참배했으나 해방 후 현지 주민들이 이 비를 훼손i?´ 방치했다가 1971년 10월 제일교포 한영출의 주선으로 비를 다시 세웠는데 지금도 일본인 후손과 관계자들이 찾아와 참배하고 있다. 이곳 교석초 부근은 물살이 세고 파도가 크며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의 능지처참된 왼팔이 버려진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북동풍이 불어오면 수겹의 너울이 밀려와 장관을 이루는 이곳에서 역사의 문장을 읽는다.

도착지에 구봉횟집이 있다. 호미곶 앞바다에 `미정호`를 띄워 주인이 직접 잡은 물고기가 수조 가득하다. 범도다리와 국수를 쓰윽 쓰윽 초장에 비벼 따뜻한 멸치국물과 내는 회국수 한 그릇을 마주한다. 새해 첫날이면 광장 가득 해맞이 인파가 넘쳐나고 봄이면 유채꽃 노란 물결과 청보리의 향연이 장관을 이루는 호미곶. 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대답하는 눈부신 파도가 한반도의 꼬리를 힘차게 일으키고 있다.

권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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