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항으로 여객선이 든다. 육지에 다녀오는 귀향객과 한껏 들뜬 관광객들이 쏟아지면 이내 빵빵하게 부푸는 섬. 육지에서 배를 타고 섬에 드는 일은 오랫동안 나를 기다린 품에 안기는 듯 벅찬 설렘을 준다. 울릉도는 화산암의 오각형 섬으로 도둑, 공해, 뱀이 없고 물(水), 미인(美), 돌(石), 바람(風), 향나무(香)가 많다고 해 3무(無)5다(多)의 섬으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보고라 일컬을 만큼 기암괴석과 원시림을 자랑하는 신비의 섬이다. 울릉도의 팔경(八景)인 `도동 모범(暮帆) - 도동항 석양 오징어배 출어 모습, 저동어화(魚火) - 저동 야간 오징어잡이 불빛, 장흥망월(望月) - 사동에 뜨는 달, 남양 야설(夜雪) - 겨울철 달밤 남양의 눈꽃, 태하 낙조(照) - 태하의 저녁 해지는 모습, 추산 용수(湧水) - 추산에 솟는 물, 나리 금수(錦繡) - 나리 동 비단단풍, 알봉 홍엽(紅葉) - 알봉의 붉은 단풍`은 사시사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도동항 방파제에서 행남산책로가 시작된다. 행남산책로는 도동항에서 저동항 촛대바위에 이르는 총 3.8km의 길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마자 펼쳐지는 동해의 물결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서 출렁인다. 수없이 모양을 바꾸며 펼쳐지는 기암절벽과 동굴을 지나며 샛푸른 물빛을 보노라니 마치 섬과 바다 사이에 흐르는 한 점 바람처럼 몸과 마음이 투명하다. 물 위 무언가가 눈길을 잡는다. 가마우지다. 물고기처럼 자맥질을 하고 한참을 헤엄치는 새의 모습이라니.

50m 쯤 걷자 자그마한 간이 횟집이 나타난다. `용궁`이란 이름의 이 집은 오목하게 휘어진 바닷가 공터에 파라솔을 펴고 전복, 소라, 성게 등 해산물들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울릉도는 양식이 이뤄지지 않아 모든 것이 자연산이다. 특히 두툼한 자연산 홍합을 끓인 국물 맛은 바다를 훌훌 들이마시는 기분이다. 용궁을 지나 다시 걷는다. 오르고 내리고 휘도는 길. 자연동굴을 지나 쉼터와 낚시터 그리고 약수터를 만나는 동안 아치형의 다리와 계단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갈매기가 날고 갖가지 해안 식물들이 고개를 든다.

몽돌해수욕장은 각양각색 크기의 둥그스름한 돌의 세상이다. 지나는 사람들은 마치 의식처럼 바위에 돌을 쌓는다. 누군가는 소망을 올리고 누군가는 근심을 내려놓을 것이다.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돌탑의 뒷모습이 아슬아슬하지만 어떤 바람도 그걸 함부로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을 떠나 바다에 이르고 숲에 이르고 강에 이르며 돌아와 다시 떠날 채비를 하는지도 모른다. 행남쉼터 간이횟집 파라다이스도 고무통마다 자연산 해산물이 가득하다. 이곳에서 잠시 쉬며 행남이란 이름의 유래를 듣는다. 이 마을은 도동과 저동 사이의 해안을 끼고 있는 촌락으로 울릉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겨울에도 살구꽃을 볼 수 있다는 따뜻한 마을로 마을 어귀에 큰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하여 `행남(杏南)`으로 불리고 있다. 또는 지형이 뱀의 입처럼 생겼다고 하여 `살구남(口南)`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다. 파라다이스 주인은 이곳에서 보는 해맞이와 해넘이는 한 번 본 사람은 영원히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답다고 했다.

행남쉼터에서 등대로 오르는 길 왼쪽 돌계단 끝에 한선이 할머니 집이 있다. 마당이 고요하다. 예전엔 가옥이 약 12채 가량 있었으나 이젠 할머니집 한 채만이 남았다. 젊어서는 물질을 했지만 이제는 텃밭 농사와 염소 몇 마리만을 기르며 혼자 사신다. 할머니 댁을 지나 만나는 세 갈래 길에서 오른쪽 행남등대 방면으로 걷는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한 시누대숲을 지나면 오래된 해송 아래 털머위의 행진이 끝없이 펼쳐진다. 작은 키에 넓적한 얼굴을 든 털머위 잎사귀는 누군가 공들여 닦아 놓은 듯 반질반질하다. 가을이면 온통 털머위가 피워내는 노란 꽃으로 물이 들고 말 길이다. 꿩의 갑작스런 울음이 꿩 꿩 산을 흔드는 오른쪽 산비탈 아래 까만 염소 두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할머니의 염소들인가 보다. 조금씩 숨이 차오를 무렵 소나무 숲 사이로 행남등대(도동등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행남등대는 9.1m 높이의 백색 8각형 등대로 울릉도의 동쪽 끝 행남말(杏南末) 끝단(등고 108m)에 위치한다. 1954년 12월 무인등대를 설치해 운영해오다가 독도 근해 조업 선박이 증가하면서 연안표지시설의 필요로 광력을 증강해 1979년 6월 유인등대화 했다. 청명한 날에는 등탑에서 독도를 볼 수 있으며, 저동항의 아름다운 모습과 촛대바위는 물론이고 또 울릉도의 상징인 성인봉의 정상까지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행남등대에서 200m 쯤 오던 길로 다시 내려와 저동항 이정표를 따라 걷다보면 소라계단을 만난다. 소라의 몸속으로 들듯 뱅글뱅글 계단을 돌아내리면 아찔하고 짜릿하다. 소라계단은 STS 원형식 계단으로 57m의 고저차가 있기 때문에 임산부나 노약자 심신장애자가 등반시 일시적인 어지러움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촛대바위 앞에 선다. `옛날 한 노인이 아내와 일찍 사별하고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조업을 나간 노인의 배가 심한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않았다. 상심한 딸은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로 며칠을 보낸 후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느낌이 들어 바다에 가보니 돛단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딸은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배가 있는 곳으로 파도를 헤치고 다가갔다. 그러나 파도를 이길 수 없어 지쳤고 그 자리에 우뚝 서 바위가 됐다. 그 후 그 바위를 촛대바위 또는 효녀바위라고 부르게 됐다. 거대하게 솟은 바위가 애달픈 사연과 함께 우두커니 저동항을 등지고 바다를 본다. 어찌 촛대바위 뿐이랴. 섬의 모든 것은 그리움과 기다림의 반죽 덩어리.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바다에서 오기에 모든 것이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섬의 길을 따라 섬에 안기는 저녁, 묶인 배들이 끼걱끼걱 흔들리는 저동항으로 저녁이 스며든다. 내 몸에서도 바다냄새가 난다.

권선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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