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환 `아시아`발행인·작가
1979년 11월 어느 날, 구상(具常, 1919~2004) 시인이 애잔한 표정으로 강단에 섰다. 문득 나는 긴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념과 규율이 강고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한국 산업화의 동력이었다. 그러나 영혼에 대해 깊이 고뇌하진 않았다. 그것이 오늘의 비극을 불렀다. 이제는 저승 가는 발길에 자녀들만이 걸리기를 바란다” 은사의 오래된 말씀을 지금도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박 대통령의 오랜 친구였던 구상 시인. 술자리에선 대통령을 `박 첨지`라 부르고 장관직 제의를 사양한 시인은 그이의 죽음에 조시(弔詩)를 바쳤다.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스스로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보사…`

시인은 `독재자에게 조시를 바치다니`라는 돌멩이를 맞아도 `친구니까`라고 웃어 넘겼다. 시인이 말한 영혼이란 무엇일까? 삶과 죽음, 인생의 근원, 진선미에 대한 사유를 수행하고 그 삶을 추구하는 정신이다. 굳이 구도자의 길을 가지 않아도 영혼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속물적 가치보다 아름다움이나 착함을 더 소중히 받들게 하는 힘이다. 영혼은 양심에 머물면서 양심을 초월한다.

물론 박 대통령이 영혼의 문제에 매달렸다면 산업화를 그토록 이끌지는 못했을 테지만, 과연 시인 친구가 비원(悲願)한 대로 국가와 시대의 짐들을 다 부리고 자녀들만 염려하는 평범한 아버지로서 이승을 하직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이에게는 인간적으로 좋은 일이었겠는데, 졸지에 자녀들은 황야로 나서야 했다.

풍찬노숙을 거쳐 어느덧 사업가로 성공한 박지만 사장. 나는 그와 58개띠 동갑내기다. 58개띠 이재무 시인이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절실한 비애`를 담은 `우리 시대 자화상`이라고 노래한 `박지만`의 실물과 나는 세 번 만났다.

1997년 7월, 포항역 광장. 4년여 정치적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포항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태준 후보의 연설회에 찬조연사로 등장한 박지만. 청중이 숨을 죽이고 연단을 쳐다보았다. 그는 얌전히 절만 하고 내려갔다. 침묵의 연설, 그러나 그것만으로 감동의 연설이었다. 2004년 12월, 포스텍 체육관. 내가 쓴 평전 `박태준`의 출판기념회에 그는 신혼여행마저 하루 미루고 신부와 함께 참석했다. 일찍이 5·16 당시에 박정희 소장은 박태준 대령에게 `거사가 실패하면 처자식을 부탁한다`고 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도 더 흐른 뒤 박태준 포철 회장이 `황야의 박지만`을 사업의 길로 인도했으니, 그해 여름과 그해 겨울에 이뤄진 두 사람의 만남은 `박정희와 박태준`의 깊은 인연이 모란꽃처럼 피어난 장면들이었다.

2005년 봄날에 나는 박지만 사장과 잠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 사이엔 커피 잔이 놓여 있었다. 그가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내가 `박태준`을 읽으며 몇 차례나 울먹이더라는 것이었다. 언뜻 나는 책속의 몇 문장을 떠올렸다.

`박정희는 박태준의 순수하고 뜨거운 애국적 사명감만은 범할 수 없는 처녀성처럼 옹호했다. 여기엔 한 인간과 한 인간, 한 사내와 한 사내로서 오직 두 사람만이 온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서로의 빛깔과 향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 독특한 인간관계는 박태준이 포철에서 자신의 리더십과 사명감을 신명나게 발현할 수 있는 양호한 정치적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요즘 언론에 `박지만 부부`가 오르내린다. 단란한 가정, 잘되는 사업. 오늘의 박 사장은 남부러울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다시 고독을 감당할 영혼을 준비해야 한다. 짧게는 누나가 경선이나 대선을 마칠 때까지고, 만약 누나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의 고독은 5년 더 연장될 수밖에 없다. 변호사인 아내는 남편이 감당할 운명적 고독의 길에서 `조용한 동반자`여야 마땅하다.

고독은 사람을 외롭게 한다. 그러나 구상 시인이 말한 영혼은 오히려 고독으로써 삶을 더 삶답게 가꿔준다. 경영실적, 법률지식, `돈쟁이`이나 세도가와 교제 등은 영혼의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가 나에게 일러준 아내의 눈물에는 영혼이 묻어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라면, 고독을 부부의 규율로 여겨도 좋다. 이 경우엔 그것이 아버지의 규율만큼 강고해야 한다.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