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도협을 빠져나와 버스에 몸을 싣고 얼마나 잤을까? 잠깐 잔 것 같기도 하고 오랜 시간 잔 것 같기도 하고…. 개운하다. 살며시 눈을 뜨자 버스는 가파른 산길을 지그재그로 힘겹게 오르고 있다. 짧은 거리가 아니다. 유리에 성에가 낀다. 창 밖 날씨가 추운 것 같다. 눈도 내린다. 길 양 옆으로 눈이 쌓였다. 비탈길을 올랐다 싶어 창 밖을 내려보면 아련한 풍경이 눈발 저쪽으로 사라진다. 세속 도시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이다. 험난한 산길이다. 길바닥은 눈, 눈, 눈이다. 버스 기사가 긴장을 한다. 얼마쯤 달렸을까. 차는 힘들게 고도를 높이며 오르고 또 오른다. 해발 3천m는 넘었을 것 같다. 거친 고개를 올랐을 때였다. 설원이 펼쳐진다. 긴장을 풀 겸 잠시 쉬자고 했다.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3년 발간)의 주인공 콘웨이는 납치된 비행기를 타고 상그릴라에 도착했다. 상그릴라. 그 이름을 살며시 불러본다. 불러 보기만 해도 마음 한쪽에 녹색 새순이 돋아 평화로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을 읽은 때는 대학 1학년 때였다. 주인공 콘웨이가 인간 세상과 동떨어진 이상향의 도시에서 체험하게 되는 사건을 모티프로 그린 소설. 그것을 읽으며 후일 상그릴라를 여행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 책을 여행 전 다시 읽었다. 제임스 힐튼은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지의 탐험가 조셉 록이 쓴 티벳 여행기에서 강한 인상을 받아 그 소설을 썼다고 한다.

쉬었던 곳에서 상그릴라 도시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다. 길 오른쪽 아래로 마을의 지붕들이 흰 눈을 마주보고 있다. 하늘같은 동네에서도 눈은 내리고, 하늘같은 동네에도 눈은 쌓이고 있다.

분지형 마을 주변은 밭이다. 하얀 눈이 가옥과 밭을 덮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살 흐르던 먼 곳은 눈이 내리지 않았는지 맨땅이다. 눈이 쌓였음에도 그냥 따사로운 느낌을 준다. 도로는 아스팔트로 쭉 이어져 있다. 이 길 북쪽으로 상그릴라가 있고, 그곳에서 티벳도 갈 수 있다. 남쪽으로는 곤명을 거쳐 베트남, 라오스까지 이어진다. 생각만 해도 까마득한 길이다.

출발한 버스는 수평이나 다름없는 아스팔트길을 시속 80km로 달린다. 그간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는 속도에 대한 복구를 하기라도 하듯 부지런히 달린다.

얼마쯤 달렸을까. 드디어 상그릴라다.

늦은 하오, 길게 그림자를 만들던 햇살이 펑퍼짐한 길에 쌓이고 쌓인다.

`잃어버린 지평선`과 선을 닿고 있는 내 마음속의 상그릴라는 동화적 요소를 갖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동화적 요소를 보여주지 않는다.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움과 티벳 불교의 색색 타르쵸와 롱다가 야릇한 기분을 갖게 한다. 상그릴라에서 처음 찾은 곳은 세계에서 제일 큰 마니차가 있는 고성 내의`대불사`였다.

평균 3천400m의 고산이라 그런지 걸음을 빨리 걸으면 힘겹다. 대불사 광장에서 사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사원 내에서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 천천히, 그리고 숨을 길게 들이쉬며 대불사로 오른다. 가파른 계단이다. 불자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가슴 설레는 좋은 기도처 중의 한 곳일 것이다.

계단 오른쪽에 세계 최대의 금빛 마니차가 빛난다. 높이가 건물 삼층 높이나 되는 마니차다. 많은 사람들이 사원보다 마니차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난 더 높은 곳의 사원으로 올라간다. 사원을 한 바퀴 돌며 상그릴라 시내를 내려본다. 전날까지 여행했던 곤명, 대리, 여강보다 넓은 편은 아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다. 우리나라 백두산(2,744m) 보다 한참 높은 곳에 있는 상그릴라다. 내려보이는 도시보다 몇 백 미터 높은 산들이 도시 주변을 감싸고 있다. 상그릴라가 소속된 운남성에는 52개 소수 민족이 있다. 그 중 많은 수를 이루고 있는 곤명의 이족, 대리의 백족, 여강의 나시족, 그리고 이곳 장족의 집 형태가 확연하게 다르다. 삶의 환경에 따른 의식주는 당연히 옷과 먹을 것, 그리고 집의 형태를 바꿔 놓았을 것이다.

사원 둘레에는 오색 타르쵸가 바람에 펄럭인다. 백색은 순수와 청순, 황색은 중앙을 가리키며 대지와 지혜, 녹색은 물과 희망, 청색은 푸른 하늘과 용감함, 그리고 적색은 믿음과 불을 상징한다. 사원에서 상그릴라 시내를 둘러보고 불상을 모신 경내로 들어간다.

금빛 불상이 나를 내려본다.

스님은 경전을 읽고 불자들은 불상 앞에서 합장과 절을 하며 예를 표한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경건한 시간이 내 몸을 감싼다. 불자가 아닌 나로서는 간단히 목례만 하고 잠시 머물렀다가 밖으로 향한다. 나오면서 종교는 인간 구원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다시 깨닫는다. 구원이 없는 종교는 영원성이 없기 때문이다.

마니차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돌리기 힘든 대형 마니차다. 보통 대 여섯 명이 돌려야 돌아간다. 불자들이, 아니 관광객들이 마니차를 돌린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세 바퀴만 돌려야 한다. 네 바퀴를 돌려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믿음으로 마니차를 돌리는 사람은 세 바퀴만 돌린다.

마니차를 돌리면 `옴 마니 반메 흠`이란 라마교의 기도를 낭송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단다.`옴 마니 반메 흠`은 “우주(옴)에 가득한 지혜(마니)와 자비(반메)가 지상의 모든 존재(흠)에게 그대로 실현되리라”라는 뜻이다.

믿음이란 것은 기도와 형식의 과정에서 완성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경전을 읽을 수 있고, 사고의 유연한 폭을 갖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글자도 모르고, 경전도 못 외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기도. 라마교의 깨달음 깊은 고스님이 제안했을 묘안이 마니차를 돌리는 기도 아니었을까? 참 좋은 기도 방법이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또 다른 사람들이 마니차를 돌린다. 낮이면 햇살을 받을 테고, 밤이면 달과 별이 빛을 깔아줄 것이다. 조금 있으면 해는 지고 달이 뜰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는 우리나라에서 남쪽으로 보이던 별자리 오리온자리가 머리 위로 머물 것이다.

마니차의 내부는 경전이 소장되어 있다. 밖에는 라마교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발길을 대불사 아래 상그릴라 고성으로 옮기는 데도 마니차는 계속 돌아간다.

막 도착한 사람들이 소원 한 줌 마음에 품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빌며 대형 마니차를 돌리기 때문이다. <계속>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