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무가 들려주는 동제(洞祭)―
동제로 마을 안녕 한마음 기원한 여강 이씨 집성촌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1리에 있는 마을 덕동(德洞)에 들어서니 솔숲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가 깊다. 고요하던 호산지당의 물결이 비늘처럼 일어서고 용계천 청아한 물소리에 고택의 문설주가 귀를 연다. 이곳은 경주 양동마을에 사시던 사의당(四宜堂) 이강(1621~1688)공께서 360여년 전에 거처를 정해 세거(世居)하게 된 여강이씨(여주이씨)집성촌이다. 덕(德)이란 `사람이 일상에 있어서 마음을 바르게 쓰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마을 사람들의 심성이나 가풍은 분명 그 이름을 향했을 터, 단아한 자태의 침곡산을 배경으로 가꾸어 온 자연과 자손대대 간직한 유물의 향취만으로도 이방인의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곳에서 전시관을 운영하는 이동진(81) 관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동제(洞祭)를 지내고, 세서연(洗鋤宴)을 치르고, 종경도(從卿圖) 판에 윷목을 던지던 오래 전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흘러 나왔다.

제사 주관하는 제관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

마을대표 자격 금기 지키며 치성으로 드려

정월 보름을 이틀 앞두고 깊을 대로 깊어진 겨울 날씨는 매서웠다. 마을 입구 당나무가 가지마다 세찬 바람을 품어 안고 우우 크게 울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당나무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주변을 쓸고 새끼를 꼬아 당나무에 금줄을 두르고 그 갈피에 한지를 말아 끼우고는 빙 둘러 앉았다. “자, 이제부터 금년 동제를 주관할 제관(祭官)을 뽑겠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회의를 주도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근엄하였으므로 모두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첫째, 산후 7일 전에 있는 남자는 안된다. 둘째, 당일 제사를 모시는 사람도 아니 된다. 셋째, 3촌이나 5촌 중 복을 입은 복인(服人) 역시 일반 상주와 같은 행세를 해야 하므로 제외된다. 그 외에도 불길하거나 불결한 것을 모두 피한 사람만이 제관의 대상이다” 나이에 대한 규정은 없었으나 반드시 관자(冠者)라야 했다. 혼인을 기준으로 관자와 동자를 구분했는데 혼전의 동자(童子)는 혹여 나이가 많더라도 아이 취급을 했으므로 제관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여보게, 자네가 올해 제관이 되어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빌어주시게” 어르신은 제관을 공표하고는 그를 일으켜 세워 간곡한 부탁의 말씀을 내렸다. 이에 거부란 없다. 그만큼 엄하게 선발되는 과정이기에 지명 받은 순간부터 그는 개인의 몸이 아니라 마을의 몸이 되는 탓이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금하며 궂은일이나 허튼 일에 가담하지 말아야 하며 부인과의 잠자리 역시 삼가 해야 한다. 마을 사람들은 당나무 주변을 시작으로 제관이 된 사람의 집에 이르는 길에 황토를 한 줌씩 뿌리기 시작했다. 4~5m 간격으로 일정한 폭을 유지하며 고불고불한 골목을 따라 뿌린 황토는 “이 집은 당제를 지낼 제관의 집이니 불결한 사람은 부디 이 길을 피해 달라”는 무언의 경고이며 당부의 표시였다. 제관으로 선정된 날 밤, 그는 목욕을 하기 위해 용계천으로 갔다. 얼음이 서걱거리는 물속으로 몸을 담갔다. 놀랍게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행여 마음을 잘못 가다듬어 제사를 지내면 마을에 무슨 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무감과 책임감이 전율로 배어든다.

다음날 아침, 제관은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쓰고 안강으로 장을 보러 나섰다. 되도록 상대방에게 얼굴을 안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장터에는 그 말고도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 두엇 눈에 띈다. 자연부락별로 비슷한 시기에 동제가 열리기 때문에 인근 마을의 제관들 역시 장을 보러 나온 것이다. 제관은 미리 생각해 놓은 상점으로 바로 갔다. 상인은 그가 제사장을 보러왔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이것은 얼마입니까?” 얼굴을 쳐다보지도 보여주지도 않고 물건 값을 부르는 대로 치른다. 제기부터 제사에 쓰이는 고기, 과일, 초, 창호지등 모든 물건들을 동제 때마다 새로 구입하지만 한 푼도 깎지 않아야 한다.

동제가 열리기 전날 밤, 제관과 그의 처는 함께 용계천으로 나가 목욕을 했다. 동제는 제관 부부만이 지내기 때문이다. 새벽 한두 시경 닭이 울 무렵을 맞춰 실과, 고기 다 갖추고 한지 위에 떡가루를 넣고 쪄서는 칼로 자르지 않고 통째로 올렸다. 금새끼를 두 번 둘러놓은 당나무의 허리에는 아무 글자도 쓰지 않은 백지를 접어 꽂고 두 자루의 초에 불을 켰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고 돌아서니 놀랍게도 금새끼에 꽂은 종이가 사라진 것이 아닌가. 누군가 가까이 와있었다는 소리다. 그 종이를 가져다 글을 쓰면 글씨가 잘 써진다 해서 빼가는 것이지만 누구도 나쁜 짓이라 여기지 않았다. 간절함이 담긴 것이 지닌 영험함을 오히려 모두가 믿었다. 철상(撤床)할 무렵 닭이 울었다. 시간이 잘 맞은 것이다. 그러나 깨어 있었던 건 제관 부부만이 아니었다. 제를 치르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서 제관과 똑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그 시간을 보냈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다시 정자에 모였다. 두루마기에 정장을 하고 저마다 제관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어른이라 할지라도 젊은 제관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동제에 올린 음식을 나누어 먹었으나 부녀자에게는 주지 않았다. 어른들부터 차례로 음복(飮福)을 하고 나서 제수음식 장을 본 기록을 열어 그 비용을 똑같이 나누어 분담했다. 제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 보다는 마을의 안녕을 모두가 함께 기원하고 그 보살핌 역시 골고루 나누고자 하는 의미가 컸다. 등짐지고 가는 사람도 동제가 열리는 날 그 마을에 머물게 되면 제례를 따르고 의복을 갖추었으며 음복은 물론 동제를 위해 지출된 경비(經費)도 마을 사람들과 똑같이 냈다. 머무는 동안은 그도 마을 사람의 일부로 인정한 탓이다. 그것을 송계 유사는 꼼꼼히 정리하였다. 동제가 끝난 뒤에도 다음 제관이 정해질 때까지 1년 내내 행실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행여 나로 인하여 마을에 혹은 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정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마을 사람들 역시 그런 그를 귀히 여겼다. `나` 보다는 `우리`를 소중히 여기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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