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비,솟을대문과 사랑채·사랑마당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 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입향하여 560여년을 내려오면서 성산이씨가 집성촌을 이룬 전통 마을이다. 2007년 12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5호로 지정된 이곳은 마을 뒤 영취산(331.7m)이 좌청룡 우백호로 마을을 감싸고 있고, 마을 앞에는 서남쪽으로 백천이 흐르고 있다. 옛날에는 그 누구도 함부로 마을 앞에서는 말을 타고 지나가지 못하고 반드시 내려서 말을 끌고 지나야만 했다는 마을이기도 하다. 그 영향으로 근대에 와서 이 마을 앞으로 철길을 내려하자 극구 반대해 결국 철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1980년대 초부터 전통마을 고건축 조사를 위하여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 마을에 이제는 교리댁, 북비고택, 한주종택, 월곡댁, 진사댁, 도동댁, 하회댁, 극와고택, 첨경재 등 11곳이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3㎞에 달하는 마을 토석담장길 또한 국가등록 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마을 전체가 조선시대 생활상과 주거상을 엿볼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

필자가 방송국 작가와 피디에게 소개한 집만 해도 한주종택의 한주정사와 교리댁, 북비고택 그리고 마을 토석담장길까지 여럿이었다. 이처럼 오랜 인연으로 TV 다큐프로 `그곳에 살고싶다` 녹화를 위해 북비고택을 찾았을 때다. 소담한 사랑채 사랑마루에 올라 주산을 바라보며 안채에서 정성껏 차려 내주신 다과상을 앞에 놓고 주인과 마주앉아 `북비고택`에 대한 내력과 건축적 특징에 대하여 다담을 나누었다.

북비고택은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口`자형 반가와는 달리 남측이 개방적인 건축배치 구성을 하고 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좌측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ㄱ`자형과 `一`자형으로 각각 남향을 하고 있는데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l`자 형으로 아래채를 동향으로 배치해 사랑채와 안채 사이를 차폐하고 있다. `口`자형 민가에서처럼 사랑채가 안채 앞을 가리지 않으면서 중문없이 내외공간을 분리해 놓았다. 이렇게 하여 사랑마당 측에서는 안채가 조금도 보이지 않도록 꾸민 것이 이채롭다. 안채에 들기 위한 중문을 설치하지 않고도 대문채에서 사랑마당 앞을 지나 안채에 들도록 하여 하였다. 자연환경에 순응해 소박하면서도 은근히 아래채로 안채와 안마당을 차폐시킨 것은 건축당시 유교사상의 숨은 배려까지 엿볼 수 있는 독특한 평면구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대문채 우측 토석담장의 행랑채로 드는 협문 상부에 `북비`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조선 영조50년(1774)에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李碩文)이 사도세자 참사 후 그를 사모하여 북향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은거한 충절이 깃든 곳으로 후일 그를 북비공(北扉公)이라고 칭했고 지금도 북비고택의 행랑채로 남아 있다.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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