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영양남씨 괴시파 종택 사랑채, 하>괴시마을 안길
1975년 겨울, 혼자 동해안을 따라 걸어 내려오다 해질녘에 다다른 곳이 괴시마을(濠池村, 호지마을)이었다. 넓은 평야를 안고 뒤 산세가 마을을 감싼 `入`자 형국의 30여호 남짓한 고을이었다. 당시 대학원 졸업논문자료 수집 차 민가 조사를 나선 때였다. 괴시마을은 이렇게 필자와 첫 인연을 맺게 되었다.

마을을 힁허케 먼저 둘러보고 고택 담장 넘어 굴뚝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을 중앙부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口`자형 정침과 우측에 사당이 보이는 고택 사랑방 앞에 서서 하룻밤 유하기를 청해 보았다. 잠시 뒤 사랑방 띠살문이 열리면서 문지방에 허리춤을 기댄 채 곰방대를 문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이 고개를 내밀면서 “추운데 얼른 안으로 들라”하셨다.

해질녘의 바닷바람은 몹시 차가웠다. 얼른 쪽마루아래 큼지막한 디딤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사랑방에 올라 어르신께 넙죽 큰절부터 올리고 사연을 고하니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사랑방 뒷문을 열고 큰소리로 외치셨다. “아가 작은 사랑에 군불 넣고 손님 상차리거레이” 하시며 하룻밤 유하는 것을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밥그릇보다 훨씬 높게 퍼 담은 대두밥으로 석식을 마치니 어르신은 이런저런 이야기 보따리를 슬슬 풀어놓기 시작하셨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양남씨 시조의 도래설이었다.

신라 경덕왕 14년(755) 당나라 헌종의 봉명사신(奉命使臣,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외국으로 가던 사신)으로 하남성 봉양부 여남 사람 김충(忠)이 일본에 안렴사(按廉使, 지방장관)로 갔다가 소임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신라 땅 영덕 축산항 죽도(竹島)에 표착하였다고 한다. 당시 당나라는 안사의 난(755~763)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였고 표착지 축산항은 바다와 경치가 좋고 인심이 유덕하여 신라 경덕왕에게 이곳에 살게 해주기를 청하여 이를 당나라 천자(天子, 헌종)에게 알리고 이곳에 사는 것을 허락받은 후, 신라 경덕왕이 사성(賜姓, 임금이 공신에게 성을 지어주는 일)하기를 남쪽에서 왔고 본고향이 여남이라 남씨(南氏)로 하였다고 한다. 아직도 어르신의 얘기가 귓가에 생생하다. 그 집이 바로 `영양남씨 괴시파 종택(경북민속자료 제75호)`이었다.

괴시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 호수)가 있어 호지촌이라 부르다가 고려말 목은 이색선생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중국 구양박사방(歐陽博士坊)의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의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귀국 후 괴시(槐市)라 고쳐 지었다고 전한다. 마을 안을 가로지르는 토담길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口자`형 평면의 전통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어 경북 동해안에 또 하나의 가볼만한 반촌의 모습을 지닌 곳으로 생각한다.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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