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환 작가·`아시아`발행인
올해 내가 읽은 책들 중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한 권은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인간사랑, 379쪽)이다. `허화평의 개헌청원론`이란 부제가 붙은 그 책의 저자는 포항 출신 허화평 전 국회의원이다. 지난 90년대에 포항시민이 두 차례 국회로 보내기 전의 그는 `5공의 설계자` 또는 `5공의 키 플레이어`로 불렸다. 그것은 그에게 정치적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국가적 위기와 혼란을 극복한 용기와 지혜와 능력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풍겼던 반면, 5공의 과오나 악덕과 분리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선입견을 줬던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그의 정치적 강점으로 작용했던 그 이미지가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사색과 논리와 주장은 `지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직시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명확한 시대정신을 제시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은 마치 수많은 명저들도 겪었던 것처럼 이른바 독서시장의 화젯거리로는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정치적 약점으로 작용했던 그 선입견과 연관성이 깊을 듯하다. `386세대`로서 학창시절에 최루가스의 매운 맛을 톡톡히 맛본 사람들은 `5공이 뭘` 하며 그 책에서 눈길을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

허화평은 김영삼 대통령시절에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정치적 프로젝트에 걸려서 옥중 출마를 강행한 적 있었다. 그때 포항시민은 옥중 후보를 당선시켰다. 대검찰청이 5공 실세들을 샅샅이 뒤졌으나 그는 `검은 돈`과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고, 무엇보다도 포항시민은 `한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알려졌던 허화평의 다시 검증된 청렴과 강직`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올해 73세인 허화평은 스스로 공직선거에 출마할 일은 없다고 확언한다. 자신의 나이에도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은 당선 여부를 떠나 `노욕`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국가의 미래에 대하여 사색하고 글을 쓰는 일은 `노익장`이라고 생각한다. 노욕이 너저분한 것이라면, 노익장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의 노익장은 이번 저서의 첫 장에 `역사의 숨결`을 생생히 불어넣는다. 훌륭한 글이어서 인용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역사는 호흡을 하는 것일까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호흡을 하듯 역사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과거 역사도, 당대 역사도, 미래 역사도 호흡을 합니다. 과거 역사는 땅 속에서, 땅 위에서, 책 속에서 호흡하면서 우리가 필요할 때면 모습을 드러내고 조언을 해줍니다. 당대 역사는 그 숨소리가 너무 크고 거칠어서 누구나 들을 수는 있지만 정확하게 분간하여 듣기가 어렵습니다. 미래 역사는 태풍의 눈처럼 자라나면서 우리 앞에 다가오지만 그 소리가 너무나 먼 곳에서 들려오기 때문에 아무나 들을 수가 없고 오직 소수만이 감지해낼 수 있습니다.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호흡하는 것일까요? 과거 역사와 당대 역사는 문명의 흥망성쇠와 제국의 흥망성쇠, 전쟁과 혁명, 질서와 진보, 발전과 성장, 파괴와 창조 같은 모습으로 진행되면서 높은 파열음을 토해냅니다. 대자연의 지각변동과 생태변화나 넓은 지역을 휩쓸고 가는 질병과 기아 또한 역사의 숨결로 남습니다. 그리고 미래 역사는 갖가지 징후들을 드러내면서 속삭입니다. 역사의 숨결은 파동과 같아서 무한한 미래로 퍼져나갈 뿐 결코 뒤돌아서거나 멈추는 일이 없습니다.

역사의 숨결을 듣는 것을 역사감각(sence of history)이라고 합니다. 현명한 자는 과거 역사의 숨결에 귀 기울이고, 명석한 자는 당대 역사의 숨결에 귀 기울이며, 지혜로운 자는 미래 역사의 숨결을 감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역사의 숨결을 듣는 것, 감지하는 것을 일반적인 역사감각이라고 한다면 다가오는 앞날에 전개될 역사의 숨결을 감지해내는 것은 창조적 역사감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공한 지도자와 민족들은 예외 없이 역사의 숨소리를 경청했던 사람들이며, 탁월한 창조적 역사감각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후진적은 분야가 무엇이냐고 한국인에게 물으면, 압도적인 다수가 서슴없이 정치라고 꼽는다. 역사의 숨결을 경청하려는 정치인은 만나기 어려운데, 돈과 거짓말로 하는 정치 뉴스가 거의 날마다 국민 앞에 펼쳐지니 그럴 수밖에 없다. 역사의 숨결을 알고 그것을 제대로 듣는 지도자는 어느 날에야 나타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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