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시내에서 순흥쪽으로 한적한 길을 달리다보면 맑은 시냇가에 울창한 소나무숲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개울 너머 일련의 고건물을 볼 수 있다.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이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은 1543년(중종 38) 이 지역 출신이자 고려말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처음 도입하여 한국 사상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회헌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아울러 유생교육을 겸할 목적으로 백운동서원을 설립하였다.

이곳은 안향이 어린 시절 공부를 했던 숙수사(宿水寺) 터이기도 했다.

이후 1548년(명종 3) 당시 풍기군수였던 퇴계 이황이 참된 선비를 양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서원을 널리 보급해야 한다고 하여, 백운동서원에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1550년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초의 서원에 배향된 이가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이라는 사실은 참 절묘한 인연인 것 같다. 또 이황이 서원을 널리 보급하고자 했던 것은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통해 후일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안향의 살았던 시기를 생각하면 이 역시 절묘하다. 올바른 정치를 행할 수 없을 때는 후진 양성에 힘써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을 안향은 그 삶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700년 전 안향의 삶을 통해 난세를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보자.

안향은 1234년(고려 고종30) 흥주 평리촌 학교(鶴橋·현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 옆의 본가에서 태어나 1305년(충렬왕31)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초명은 유(裕)였고, 훗날 향(珦)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문종의 휘가 그의 이름과 같았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조선시대에는 안유로 불리웠다.

그가 태어났던 시기는 무신정권이 전성을 구가하던 때이며, 그가 과거에 급제했던 해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몽골의 본격적인 간섭을 받기 시작했던 1260년(원종1)이었다. 또 그의 관로는 매우 화려했고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몽골인 출신 권력자의 미움을 받아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야만 했었다. 그리고 재상이 된 뒤에는 `행동을 조심하여 감히 다투지 않았다`고 평가받았다. 원나라의 지나친 압박과 견제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고 있는 정치적 현실을 그대로 수긍하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향이 무사안일주의였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재상에 오르기 전 그는 매우 적극적인 관료였다. 1271년(원종12) 서도(西道)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청렴하다는 평을 받았고, 다시 내시원의 관료가 돼서는 내시원의 오래된 폐단을 혁파하였다. 또 1275년 상주판관에 임명되어 3년간 재직하면서 요신(妖神)을 받들고 군현을 횡행하며 관민(官民)을 현혹시키던 여자 무당 3명을 치죄하기도 하였고, 일본 원정을 위한 전함 건조·군량 저축, 가혹한 세금 징수 등으로 곤경에 처한 백성들을 소생시키기 위해 노력을 다하였다. 이를 보면 청렴을 바탕으로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열전을 보면, `안향은 장중(莊重)하면서도 인자하니 사람들이 모두 경외하였다. 재상이 되었을 때 일을 도모하는 것과 판단력이 뛰어나 동료들이 순응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몽골 출신 관료나 그와 결탁한 관료들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원나라의 제후국으로 격하한 고려의 관료로서는, 몽골 출신 관료를 억제할 힘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마도 섣부른, 혹은 감정적인 대응은 화만 미칠뿐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현실에서 안향이 기대를 걸었던 것은 교육이었다.

사실 안향 자신이 뛰어난 학자였다. 안향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하며, 과거 급제 후 비서성이나 한림원과 같은 문한 기관에 주로 임명되었다. 중견 관료되는 국자 사업으로 국학의 생도를 교육하는 위치에 있었다. 재상이 되어서는 집현전대학사나 감수국사와 같은 문한직을 겸직할 정도로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항상 주희의 진영을 걸어두고 경모하였으며 마침내 호를 회헌이라고 할 정도로 주희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학문 연마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후진 양성이었다. 그가 `국학을 발전시키고 현량한 후진을 양성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비록 일을 사직하고 집에 있어도 늘 교육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평가받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안향은 상당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제력을 아낌없이 교육에 투자하였다. 1301년(충렬왕27) 국학(성균관)을 중건할 때 안향은 자신의 저택을 국가에 바치고 토지 30결과 남녀 노비 각 100인을 국학에 귀속시켰다. 조선 전기에 안향의 후손들이 성균관에 입학하였을 때 성균관 노비들이 `우리의 상전이다`라고 했다고 하며, 성균관 관원들이 다른 학생들보다 후하게 대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안향이 국학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상당한 재산을 기부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가 지공거, 즉 과거 시관이었을 때 급제자 30여 인 모두에게 돈피이불을 선물하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성리학을 도입하였다. 1290년(충렬왕16) 3월 24일 충렬왕, 왕비, 세자가 원에서 돌아올 때 함께 귀국한 안향이 원의 대도(大都)에서 주자서를 필사하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모사하여 돌아왔다. 1304년(충렬왕30)에는 국학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섬학전을 확보하고, 그 돈의 일부로 중국에서 육경, 제자(諸子), 사서(史書)를 사와 국학에 비치하게 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개혁적인 후진들이 양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에 의해 원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또 고려의 묵은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나타날 수 있었다.

이황이 을사사화를 겪으면서 훗날을 기약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던 것이나 안향이 현실 정치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도 후진 양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은 같은 맥락이었던 것이다. 원나라에 비해 열세일 수 밖에 없는 고려의 현실을 직시하고 안정된 내치를 도모하고 문풍을 진작시킴으로써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난세를 살아가는 지혜를 700년 전 안향 선생의 삶을 통해 다시 한 번 배우게 된다.

/이욱(한국국학진흥원 고전국역실장)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