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째 이어온 구룡포 장터 국수공장
치렁대는 면발새 세월의 더께 켜켜이

구룡포 장터 제일국수공장, 할머니가 쌓인 국수 가락을 한 줌씩 저울에 올려 정확히 가늠하고는 아래 위 척척 길이를 맞춘다. 각을 세운 탁자 모퉁이에서 딱풀 한 점 콕 찍어 흰 종이 띠를 두른다. 벽에 기댄 밀가루 포대들과 긴 국수틀, 추가 달린 묵직한 저울이 할머니처럼 오래 그곳에 살고 있다.

감포가 고향인 이순화 할머니(72세)는 24살에 구평리 당수나무 부근으로 시집을 왔다.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휘휘 불어오는 바다 가까이에서 호롱불을 밝히고 시어머니와 시누이, 동서 내외가 함께 살았다. 몇 년 후 옹기장수가 세를 얻어 장사를 하고 있던 집을 샀다. 구룡포 장터에 있는 작고 허름한 일본식 목조 가옥이었다. 바람이 큰 날에는 집까지 파도가 밀려왔다. 시어머니께서 옹기장사가 팔다 남은 옹기를 그대로 받아 놓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하게 된 옹기장사. 오천 옹기공장에서 옹기를 가득 실은 달구지를 끌고 소가 비포장 길을 걸어왔다. 외상으로 한 달구지를 받아 다 팔면 갚고 또 받아 팔고. 그렇게 벌어 학고방 같던 집을 조금씩 수리하며 살았다.

옹기장사를 할 때 곁에 대보국수공장, 오천국수공장이 있었다. 당시 구룡포에는 영남국수공장, 털보국수공장등 모두 합치면 여덟 개나 있었는데 어디든 국수는 팔렸다.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해 옹기장사는 뒷전이고 날마다 놀러나갔다. 국수공장을 하면 일이 많으니 아무래도 술도 덜 마시고 덜 나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옹기장사를 접고 국수공장을 열었다. 기계를 사들이고 기술자를 고용해 2년 동안 부지런히 보고 배웠다. 일은 고되지만 벌이는 옹기보다 나았다. 할머니 나이 서른한 살에 시작한 일이니 꼬박 41년 동안 가내 수공업으로 국수를 만들어 온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식구는 많고 먹을 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시래기고 뭐고 된장 풀어 끓이다가 굵은 국수 가락 뚝뚝 분질러 넣고 양을 부풀리면 온 식구 둘러 앉아 허기를 채웠다. 잔치고 뭐고 큰일을 치를 때도 국수를 삶았다. 나무상자로 네 상자 다섯 상자씩 사다가 가마솥을 걸고는 커다란 채반에 줄을 달아 국수를 잔뜩 올려놓고 물이 팔팔 끓으면 푹 집어넣었다가 건져 찬물에 씻었다. 잘 익어 말간 국수를 한 덩이씩 돌돌 말아 광주리에 쌓았다가 그릇그릇 담아 싱거운 멸치 국물을 얹은 게 고작이었지만 손님들은 국수 그릇 앞에 행복하게 모여 앉았다.

밀가루는 포항 도매상에서 가져 왔다. 처음 일을 배울 때는 반죽이 적당치 않아 실패도 했다. 그러나 실패한 국수는 다시 반죽 할 수 있었으므로 몸이 고될 뿐 손해는 없었다. 국수는 굵기에 따라 20반, 22반, 24반, 26반, 27반등 여러 가지인데 숫자가 클수록 면이 가늘다. 지금은 크게 우동, 중면, 소면으로 나뉘지만 예전엔 우동면 보다 훨씬 더 굵은 면도 만들었다. 처음엔 나무로 된 반죽통이 달린 기계를 썼다. 국수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대꼬챙이로 일일이 받아 건지고, 걸고, 길이를 눈으로 가늠해서 칼로 잘랐다. 젖은 국수를 널고 말리고 걷어 재단을 마치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리는데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야속한 할아버지는 생각처럼 일을 많이 도와주지 않았다. 여전히 틈만 나면 친구 찾아 술 찾아 마실을 다녔다. 종종거리며 국수공장 일을 마치면 집안일이 할머니를 기다렸다.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겨우 빨래를 할 수 있었던 고단한 세월이었다.

“우리 영감? 살아계셨으면 나와 네 살 차이니 올해 일흔여섯 이지. 그렇게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던 양반은 결국 쉰둘에 위암 수술을 받았어. 그리고 예순에 돌아가실 때까지 대구 병원에 12번이나 입원을 했지. 수술하고 술만 안 잡쉈어도 더 살았을 텐데….”

할아버지께서 앓아누우면서 그나마 거들던 손을 놓자 할머니는 두 아들의 힘을 빌어야 했다. 아들들은 기특하게도 할아버지 빈자리를 야물게 채워 주었다. 큰 아들은 단기병으로 지서에 근무 할 때 하루 근무하고 하루 쉬고 했는데, 아침에 퇴근하면 바로 일을 도왔다. 그리고 다음날엔 종일 마른 국수를 재단까지 해 주고 저녁 무렵 출근을 하곤 했다. 장터에 있던 국수공장이 하나 둘 문을 닫는 세월에 제일국수공장이 지금까지 남을 수 있었던 건 두 아들 덕이다. 모두 장성해서 번듯한 직장을 가졌지만 지금도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말마다 들어와서 할머니와 국수를 만든다. 제일국수공장은 이제 일주일에 한 번 국수틀이 돌아가고 건조장 가득 뽀얀 국수가 널린다.

밀가루와 소금 그리고 물이 국수의 모든 재료다. 국수를 만들기 이틀 전, 할머니는 고무통에 소금을 넣고 물을 부어 나무로 휘휘 저어 놓는다. 덜 녹은 소금과 이물질들이 가라앉고 난 뒤 맑은 소금물만 떠서 반죽에 쓰기 때문이다. 반죽통에 밀가루를 세 포대 붓고 그 위에 맑은 소금물과 맹물을 섞어 반죽을 하는데 이유는 소금물로만 하면 국수가 짜지기 때문이다. 간도 간이지만 물과 밀가루의 비율을 잘 맞춰야 되지도 묽지도 않은 반죽이 된다. 그건 오로지 할머니 몫이다. 반죽이 되면 작은 아들은 롤러로 납작하게 밀며 돌돌 감는다. 다 감으면 두벌치기에 들어간다. 처음 밀어 놓은 것을 두 장으로 겹쳐 다시 한 번 조이며 롤러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더욱 납작하고 야물어 진다. 그 후에는 국수 크기에 따라 틀을 끼우고 국수 가락을 뺀다. 요즘은 기계가 좋아 국수를 걸칠 시누대를 차곡차곡 넣어 놓으면 탈카닥 탈카닥 국수 가락을 걸고 올라가고 저절로 알아서 적당한 길이로 잘라진다. 큰 아들은 얼른 시누대에 걸린 국수를 들고 뒷마당과 옥상에 굵기별로 분류해 넌다. 세월이 할머니와 아들들의 손발을 척척 맞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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