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학자·독립운동가·소설가 이문열 배출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院里里) 두들마을은 인조 18년(1640)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1590~1674) 선생께서 터를 잡으셨으며 4자 숭일(恒齋 李嵩逸)이 선업(先業)을 잇고, 방후손(傍後孫)들이 더해져 재령이씨(載李氏) 집성촌(集姓村)이 됐다. 마을 이름은 마을이 언덕(두들) 위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것이다.

이곳은 일찍이 크게 문풍(文風)이 일었던 곳으로 훌륭한 학자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조선시대에는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과 밀암 이재(密菴 李栽) 등이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학문을 계승·발전시켜 후학에게 널리 했다. 근세에는 의병대장을 지낸 내산 이현규(奈山 李鉉圭), 유림대표로 파리 장서사건에 가담한 운서 이돈호(雲西 李暾浩)와 이명호(李命浩), 이상호(李尙浩) 등 독립 유공자와 이병각(李秉珏), 이병철(李秉哲) 등 항일 시인이 이곳 출신이다.

이 마을에는 모든 여성에게 길이 사표(師表)가 될 정부인 안동장씨(貞夫人 安東張氏)의 자녀교육에 대한 전범(典範)과 부덕(婦德)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 곳은 소설가 이문열(李文烈)의 고향으로 그의 문학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펼쳐진 무대이기도 하다.

◆정부인 안동장씨 예절관

정부인 장씨(貞夫人 張氏:1598~1680), 선조 31년 경북 안동 금계리(溪里)에서 태어나서 숙종 6년 83세를 일기로 영양 석보촌(石保村)에서 타계했다. 만년에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이 대학자이자 국가적 지도자에게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아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므로, 법전에 따라 정부인의 품계가 내려졌다. 이 때부터 `정부인 장씨`라 불리게 됐다.

정부인 장씨는 왜란으로 전국이 쑥대밭이 돼 있던 정유재란 다음 해에 태어났으므로, 이후 광해군 통치에 뒤이은 인조반정(1623년)이라는 정치적·사상적 혼란기를 겪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1636)이라는 이전 역사에 없었던 치욕적인 국가적 수모까지 겪으면서 살아간 세대에 속했다.

◆정부인 안동장씨 유적비

정부인 안동장씨의 학문과 예술, 자녀교육에 대한 전범(典範)을 기리기 위해 1989년 10월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영석(朴永錫)이 짓고, 장상조(張相朝)가 썼다. 이 유적비의 배면(背面)에는 부인의 대표적인 한시(漢詩 `소소음(蕭蕭吟)`이 각인돼 있다.

◆석계고택(石溪古宅)

안동 대명동(大明洞)에서 석계(石溪)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숙종 1년(1675) 4남 숭일(嵩逸)이 모친 정부인 안동장씨를 모시고 고향에 돌아와 선인의 옛터에 집을 중수하고 당호(堂號)를 항재(恒齋)라 했다.

석계고택은 일자형의 사랑채와 안채를 흙담으로 막아 허실감(虛失感)을 메우고 `뜰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고, 사랑채는 후면에 감실(龕室)을 설치한 삼량가(三樑架)의 구조이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로 지정돼 있으며, 320년이 넘는 유서 깊은 집이다.

◆광산문학연구소

한국 현대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도를 양성하기 해 소설가 이문열씨의 고향인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에 광산문학연구소를 건립하고 2001년 5월12일 개소식을 가졌다. 이 연구소가 들어선 석보면 원리리 두들 마을은 재령이씨의 집성촌으로 2000년 10월 전통문화마을로 지정된 마을로서 민속자료 제91호인 석계고택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와 정부인 안동 장씨의 유적비등이 있는 유서깊은 고장이며, 두들마을은 이문열의 소설 `선택` 등의 배경 장소로도 유명하다.

◆석천서당(石川書堂)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선생이 영해부에서 석보로 이주해 초당(草堂)을 지어 유생과 아들들을 강도(講道)한 곳으로 영조 46년 (1771) 중수(重修) 하고, 당호를 석천서당(石川書堂)이라 했다. 그 후 고종 28년(1891)에 중건(重建)해 현재에 이르며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79호로 지정돼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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