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이라는 위대한 공간에서 부르는 노래

<북방에서> …………………………………………………………………………………… 백석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익갈나무의 슬퍼하던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들던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던 것도

쏠론이 십리 길을 따라 나와 울던 것도 잊지 않었다 (후략)

백석의 `북방에서`는 이육사의 `광야`와 더불어 `숭고`를 성취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시도 `광야`처럼 태초와 유사한 `아득한 옛날`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서 시적 화자는 그런 태곳적 시간을 떠나왔다. 그 오랜 여행을 이 시는 기록하고 있다.

아득한 옛날에 시적 화자는 옛 하늘과 땅을 떠난다. 그곳의 짐승들과 자연물의 만류를 뿌리치고, 여러 부족의 아쉬운 전송을 받지만, 시적 화자는 그 이별에서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느끼지 않고 수많은 시간을 거쳐 먼 앞대, 즉 남쪽을 향해 떠난다. 그리고 또 긴 시간이 지나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에 그는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다시 옛 하늘과 땅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그곳에는 옛 자취도 없고 자랑삼을 만한 것이 없음을 발견하고, 화자는 절망한다. 이것이 이 시의 뼈대이다.

그가 떠나온 이 `아득한 옛날`은 무엇일까. 이 시간은 부여와 숙신, 발해, 여진, 요, 금이라는 역사상의 국가나 민족명과 동일시된다. 또 여기에는 오로촌(Orochon)족. 북방 퉁구스계의 한 종족도 등장하고, 쏠론, 즉 남방 퉁구스족의 일파인 색륜족도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비슷한 지역에 사는 종족이다.

이들 민족과 국가는 그러나 동일 시간대가 아니다. 그 시간은 기원전에서부터 12세기에 이르는, 수많은 국가가 소멸되고 탄생을 거듭했던 시간이며, 많은 종족이 새로 역사에 등장하고 사라진 시간이다. 그런데 이 시간의 흐름은 국가와 종족의 명칭이 뒤섞여 있어 일관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것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그 공간은 바로 `옛 한울과 땅`으로 명명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자연과 그 속에 놓인 모든 생물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신성한 공간이다. 시인은 왜 이곳을 이토록 신성한 공간으로 표현하였을까. 이곳이 바로 우리 민족의 터전으로 여겨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바로 우리 민족의 시원지이자 주요 활동영역이었지만 신화 속에만 남아 있는 만주 지역이다. 특히 이 작품에 인용된 고유명사들은 모두 만주에서 활동한 국가와 민족명이다. 이 공간은 흥안령과 음산산맥, 아무우르(흑룡강), 숭가리(송화강)를 포함하고 있는 광대한 지역이다. 이육사가 `신성한 광야`로 부를 수 있는 곳도 이곳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단순한 개인적인 감상을 적은 서정시가 아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시적 화자의 이동 방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적 화자는 부여, 숙신, 발해 등을, 아무우르와 숭가리 등을 떠나 `먼 앞대`를 향하여 왔다고 한다. 남쪽이라는 의미의 `앞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시적 화자의 경로가 바로 우리 민족의 이동 경로와 일치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성스러운 장소인 민족의 태반 즉 만주벌판은 그런 원형 상징을 심층 내면에 지니고 있는 시적 화자에게 있어서 민족사를 구성하는 태초의 신성성을 지닌 곳이 된다. 바로 이 점이 `광야`와 `북방에서`의 시공이 모두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유이다. 원형 상징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에 서거나 그곳을 생각하면 그 누구라도 그런 신성 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백석이 `북방에서`에서 만주를 이렇게 숭고하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을 떠돌며 그곳에 남아있는 우리 선조의 신성성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1940년경에 서울의 신문사를 그만 두고 만주로 떠난다. 그는 여러 일을 하며 만주 일대를 떠돌다 해방이 되어서야 고향 정주로 돌아간다.

이 시는 바로 이 만주 체험에서 나온 웅장한 작품이다. 짧지만 웅대한 서사시적 풍모를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은 바로 원형적인 서사시의 세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질곡을 극복하기 위한 백석 나름의 고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국수주의적 민족감정으로부터 미적 거리를 유지하며 도달한 시적 수준이 돋보이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경북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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