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재발견- 달구벌, 그때 그 시절(하)

`달구벌 그때 그 시절`로 명명된 1코스는 대구 출신 인물과 6·25전쟁 당시 피난온 문화인 예술인들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골목에 얽힌 일화와 인물들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투어다.

경상감영공원에서 시작돼 향촌동~대구역~종로초등학교~달서문~섬유회관~오토바이골목~삼성상회~달성공원으로 이어지는 2㎞ 구간이다.

진골목 입구에는 형형색색의 떡과 이바지 음식이 화려하게 진열돼 있고 돼지고기 수육이 때깔 좋게 놓여 있는 염매시장을 볼 수 있다.

유신 무렵 학생들이 모여 술 한잔에 현실을 통곡하고 장기집권을 계획하는 정권을 저주했다고 붙여진 `곡주사`란 이름의 술집도 남아있다.

진골목 끝의 미도다방도 일화가 가득한 곳이다. 유명한 정치인이며 공직자들이 드나들던 다방으로 2천원이면 커피나 약차와 함께 한과, 강정을 맛보면서 한복을 곱게 입은 마담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약령시 골목의 한쪽에는 지금은 약재창고가 돼버린 `마당 깊은 집`을 발견할 수 있다. 소설가 김원일이 피란시절 살았던 곳으로 훗날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무대가 됐고 지금은 주변 담벽에 그려진 벽화가 소설을 통해 짐작만 했던 옛 골목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골목마다 일화·유명인사 발자취 서려있어

순종황제 어가길 재현시 관광명소화 기대

■소주 반 병과 `녹향`

이곳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영화관인 만경관을 지난 5분여 거리에 있는 경상감영공원으로 발길을 돌려 본격적인 투어를 하면 된다.

경상감영공원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조선에 파병온 중국 명나라 장수인 두사충 장군이 선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이었지만 감영이 들어선다고 할 때 두장군은 흔쾌히 자신의 영지를 반납하고 물러났다. 그래서일까, 중국인들이 대구를 방문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바로 남부정류장에 있는 두사충 장군의 사당인 `모명재`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대구의 중심지는 향촌동으로 통했다. 일제 강점기 대구 기생들의 주무대였으며 기생들을 훈련하는 권번이 있었고 요릿집과 요정이 즐비했다. 100여년 전의 화려함은 다 잃고 `초원의 집 화재 사건` 정도로 인식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대구의 별미로 통한 따로국밥도 6·25 전쟁 당시 피난온 모 여배우가 국에 말아먹는 밥을 잘 먹지 못하자 식당 주인이 여배우만을 위해 국과 밥을 따로 주면서 시작됐다는 일화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골목에는 특이한 메뉴가 있다. 바로 `소주 반병`이다. 한 접시에 3천원짜리 돼지불고기 안주도 있고 1천원을 내면 들어갈 수 있는 댄스홀과 푸짐한 국수 한 그릇에 2천원이면 족한 국수집도 있다.

특히 향촌동에는 지난 1946년 문을 열어 6·25전쟁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대한민국 최초의 음악감상실 `녹향`을 빼놓고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양주동 박사를 비롯해서 이중섭, 양명문, 최정희 등 대구로 피란 온 문인과 예술가들이 이곳에 죽치고 앉아 바흐를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무대쪽으로 놓인 50개의 좌석 어디쯤에서 작사가 양명문은 가곡 `명태`의 가사를 썼고 이중섭은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2년전 폐관 위기에 몰렸지만 녹향을 아끼는 음악인과 동호인의 자선모금으로 기사회생했고 그 흔적이 50개 좌석마다 적혀 있는 기부자의 이름표가 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서문시장의 유래가 된 달서문

지금은 현대화 돼 옛 모습을 짐작하기 힘든 대구역을 지나 조금 걷다보면 종로초등학교가 나온다.

대구의 유서깊은 초등학교인 종로초등학교는 처음 중구 서문로 1가에서 1900년 11월 남성동 제일교회에서 개교한 뒤 1926년 희도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했고 지난 1955년 대구종로국민학교로 다시 교명을 환원했다. 대구의 알 만한 유명인사들은 이곳 종로초를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구읍성의 서편에 있었던 달서문. 이곳의 이름을 따서 처음 개장한 서문시장의 시작은 조그마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거대한 오늘의 모습을 지니게 됐다. 400년 전 대구읍성 북쪽에 경상감영이 설치되고 그 객사 인근에 난전이 섰고 이곳이 오늘날의 서문시장 터잡기의 기초가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서문시장의 각종 눈요기를 하고 나서 조금만 걷다보면 섬유회관이 나온다. 이곳 건너편에는 대구 3·1운동 발원 표지석이 있어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

이곳에서 북성로 쪽으로 방향을 틀면 중구 수창동과 인교동에 걸쳐 일명 `오토바이골목`이 등장하고 `북성로 공구골목`도 연이어 붙어 있는 곳이다. 지난 1953년에 하천이 복개공사가 진행되면서 교통이 원활해졌고 자동차상가와 가까워서 하천을 복개한 이후 좌우로 상점이 조성됐다.

울산지역의 조선소나 철강소에 근무하는 이들이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하는 것처럼 섬유회사 임직원들도 오토바이를 많이 타고 다녔다. 당시의 오토바이 성능은 지금의 오토바이와는 많이 달라서 잔고장이 많았고 출근시간이면 시동이 걸리지 않아 출장수리가 많아 골목을 형성하는 데 한몫을 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대구 오토바이 골목에는 지금은 사라진 아주 오래된 오토바이도 잘 보관돼 있다. 박물관에서나 봄직한 CD50(1969년), CL90(1969년 국내최초의 상업용 오토바이), 솔라(1980년 국산모델 최초의 스쿠터)를 직접 볼 기회를 제공한다.

■`삼성상회`와 달성공원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서문시장 끝자락엔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 터가 남아있다.

삼성상회 터는 삼성의 창업주인 고 호암 이병철 회장이 28세 청년이던 1938년 3월1일에 청과물과 건어물, 국수를 팔면서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660㎡ 남짓한 공간에 지상 4층짜리 목조건물을 짓고 전화기 1대와 국수기계, 직원 40명으로 시작했다. 별 세 개가 그려진 별표국수로 성공하면서 별을 의미하는 `삼성(三星)`을 작명했다고 한다. 현재는 삼성상회 터를 알려주는 표지와 건물을 떠받치던 6개의 기둥만이 남아 이곳이 삼성의 유래지임을 알려줄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타지 사람들은 대구하면 달성공원을 떠올린다.

지난 1971년 문을 연 달성공원은 처음 코끼리와 호랑이, 낙타 등을 볼 수 있었던 곳이며 전국의 몇 안되는 동물원 중의 하나로 명성을 날렸다. 30여년 동안 달성공원의 수문장 이자 아이콘 역할을 톡톡히 했던 2m25cm의 거인 고 류문수씨를 반추하게 한다.

이곳 달성공원 주위에는 끝없이 늘어선 좌판에 순대부터 곱창, 감주, 어묵, 옥수수, 칼국수, 보리밥, 호떡, 풀빵 등 다양한 음식이 진을 치고 있다.

대구의 또 하나의 명물로 통하는 `납작만두`를 처음 만들었던`미성당`에는 여전히 호떡과 납작 만두를 찾는 이들로 북적이고 있다.

/김영태기자 piuskk@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