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적 주자학` 영남학파의 주춧돌을 놓은 청백리

지난 해 여름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의 원래 이름은 양좌리(良佐里)이다. 양월리(楊月里) 왼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처음에는 `양좌(楊左)`라 했는데, 뒤에 어진 인물들이 많이 나와 `양좌(良佐)`로 바꿔 불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양동이 배출한 어진 신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있다. 외삼촌과 조카 사이인 이 두 사람은 양동마을을 양분하고 있는 대성인 월성손씨와 여강이씨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특히 이 가운데 회재는 조선유학사의 첫 번째 논쟁으로 주목받는 `무극(無極)·태극(太極)` 논변을 통해 당시 학술적으로 뿌리를 내리던 주자학의 실천적 성격을 명확히 함으로써 영남학파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유학사 첫 논쟁 `무극·태극` 논변으로 유명

휼륭한 철학자에 강직한 선비·효 실천한 군자

회재는 1491년 11월25일 외가인 경주 양동의 월성손씨 대종가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10여세를 넘기면서 외삼촌인 우재에게 글을 배우며 차츰 주자학에 대한 소양을 쌓기 시작하여 24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급제 이듬해 고향인 경주에서 국립학교 교수에 해당하는 주학교관(州學敎官)을 지내면서 주자학에 대한 탐구에 매진했는데,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와의 유명한 무극·태극 논변은 이처럼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젊은 시기인 27세 때 이루어졌다.

주자학에서 `리`는 모든 만물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본이치이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근본이치인 `사람의 리`가 있기 때문이며, 대나무가 다른 나무와 구분되는 것 역시 대나무를 대나무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대나무의 리` 때문이다. 요컨대, 어떤 사물을 그 사물답게 하는 이치가 곧 `리`인 것이다. 태극은 이런 모든 사물의 개별적 이치들의 근원이 되는 궁극의 이치를 가리킨다.

`무극·태극` 논변의 핵심은 이러한 태극의 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망기당은 태극은 모든 개별적인 `리`의 근본에 해당하기 때문에 초월적이며 고차원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태극인 `리`를 체득하기 위한 공부 역시 마음의 본자리를 중시하는 내면 공부를 통해야 가능하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회재는 망기당의 이런 생각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이치를 깨우칠 것을 요청하는 주자학의 근본정신을 왜곡하는 것이라 여겼다.

회재에 따르면, 세계의 궁극적 이치인 태극은 초월적이며 고차원적인 것 아니라 사람다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일상들을 통해 구현된다. 세상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답고 신하답고 부모답고 자식답고자 하는 우리들의 도덕적 행위 하나하나 속에 태극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내면 공부에만 집중하면 안 되고 `다움`을 구현하려는 일상의 구체적인 도덕적 행위들을 병행해야 한다. `리`에 대한 회재의 이러한 입장은 뒤에 후배인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리`의 능동성을 중시하는 영남학파의 전통을 이루게 된다. 이 때문에 퇴계는 무극·태극 논변에 비친 회재의 입장을 유학적 진리의 참모습을 밝히고 거짓된 학설을 물리친 쾌거라고 높이 평가했다.

회재는 철학자로서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옳음을 위해서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선비였고, 집이 매우 가난하여 식솔이 굶주릴 때도 있었다고 명종실록의 졸기(卒記)가 전할 정도로 청렴했던 청백리였으며, 모친에 대한 효를 다함으로써 사람의 도리를 몸소 실천한 군자였다.

40세 때 사간원의 사간으로 있으면서 당시 국정을 농단하던 김안로(安老)가 세자의 스승에 임명되려 하자 그가 소인(小人)임을 들어 반대하였는데, 이 일로 김안로 추종자들의 미움을 사 벼슬이 좌천됐다. 하지만 그런 뒤에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아 결국은 탄핵을 받고 42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회재는 옥산(玉山) 자락에 독락당(獨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오직 학문과 수양에만 매진했다.

이후 김안로의 실각으로 47세에 다시 벼슬에 나아간 회재는 홍문관제학과 경상도관찰사, 의정부좌찬성 등의 요직을 거치며 바른 정치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중종 사후 이른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권력투쟁으로 빚어진 어수선한 정국은 올바른 정치를 구현하려는 그의 노력을 좌절시켰다. 그 결과 양재역 벽서사건의 여파로 윤원형 일파에 의해 1547년 관직이 삭탈되고 평안도 강계로 귀양가는 비운을 맞는다. 회재는 귀양지에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정진했는데, 현재 전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저술된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러한 학문적 성취와 달리 회재는 귀양지에서 7년을 보내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553년 11월23일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나 회재의 인물됨은 사후에 바로 평가받아 1560년 명종에 의해 관직을 복권됐다.

이어 1568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이듬해에는 문원(文元)이라는 시호를 받고 명종의 묘정에 배향됐으며, 1610년에는 마침내 문묘(文廟)에 종사됨으로써 역사적 평가에 마침표를 찍었다.

/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회재 흔적 어린 향단과 무첨당

회재는 효자였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중종이 병환중인 노모를 모실 수 있도록 건물을 하사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일화이다. 향단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지금도 양동마을 어귀에 서서 회재의 효성을 후대에 전한다. 양동마을에는 향단과 함께 회재의 손자인 이의윤(李宜潤: 1564 ~ 1597)이 할아버지의 학덕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는 삶은 살지않겠다는 뜻에서 당호를 정했다는 종택 무첨당이 있어 회재의 숨결을 후세에 전한다. 이웃 안강에 있는 옥산서원과 독락당 역시 회재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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