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2월 국보 제29호로 지정된 `성덕대왕신종`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그 무게가 18.9t에 이른다. 종의 몸체에 새겨진 1천여자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으로 주조를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자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제36대 혜공왕이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7년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경주 북천 근처의 봉덕사에 달아 `봉덕사종`이라고도 하였고,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해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俗傳)을 따라 종을 칠 때 아이가 어머니를 찾는 울음소리를 본떠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왔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봉덕사가 폐사된 뒤 세조 6년(1460)에 영묘사(靈妙寺. 현 경주공업고등학교)로 옮겼으나 큰 홍수로 절은 떠내려가고 종만 남았다. 다시 중종 1년(1506)에 봉황대 옆 경주 읍성 남문 밖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건축 단층 팔작 기와지붕의 종각을 짓고 이곳에 종을 옮겨와 성문을 열고 닫을 때, 그리고 군사의 징집을 알릴 때 이 종을 쳤다고 한다. 이렇게 400년 이상 보존하다가 1915년 8월 종각과 함께 동부동 구 박물관으로 옮겼으며, 1975년 5월26일에 지금의 경주박물관 내에 현대식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신축한 종각으로 다시 이전하였다.
1998년 안전진단 과정에서 종의 무게가 18.9t(3만1천500근)으로 밝혀졌는데 제작당시 기록에 의하면 12만근 즉 72톤의 동(銅)으로 주조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53t은 어떻게 된 것일까. 혹시 종을 두어 개 더 만든 것은 아닐까. 몽고군이 종을 뗏목에 싣고 훔쳐가다가 종의 무게에 못 이겨 강이나 바다에 빠뜨린 것은 아닐까. 감은사 앞 대종천(大鐘川)과 동해바다가 만나는 해안선 부근에 큰 파도가 치면 종소리가 들린다는 이 마을 사람들의 속설에 따라 해병대 수색대가 종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지만 그 결과는 실패했다. 또 몇 해 전 지리산 섬진강변 용두리 마을의 용소(龍沼)에서 일현 스님이 전설을 따라 또 하나의 종을 찾아 나섰다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에밀레종은 정말 하나뿐이었을까. 나머지 53t은 어떻게 되었을까. 언제쯤이나 종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