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읍에서 옛 36번 국도를 따라 영주 방향으로 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도촌초등학교 앞에 이른다. 이곳을 지나면 바로 ‘낙화암천’이라는, 사연이 있음 직한 이름을 지닌 개천을 만나는데, 이 개천을 건너자마자 우회전해 올라가면 사제마을이라는 곳이 나온다. 조선 초기부터 550여 년 세월을 이어온 우계 이씨 집성촌이다.

 마을을 들어서면 입구에 입향조를 모신 도계서원이 방문객을 맞는다. 사당과 강당 그리고 관리 채인 고직사로 이루어진 단출한 구도의 서원이다. 그런데 사당과 별도의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는 강당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구도의 그런 단조로움을 일거에 깨뜨리는 기이한 모양의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정면 1칸에 측면 2칸 반, 옆으로 길쭉한 구조로 되어 있는 이 건물은 동남향으로 배치된 서원의 다른 건물들과 달리 서북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게다가 그 방향으로만 틔어 있을 뿐, 나머지 세 방향은 모두 벽체로 막혀 있는 구조이다. 이처럼 생김새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이 건물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한양에서 이곳 사제마을로 낙향하여 은거한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 1435~1528)이 거처하던 곳이다.

 고려의 멸망과 세조의 왕위 찬탈은 당시 신진사대부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것은 ‘절의’를 중시하는 주자학적 가치관에 정면으로 반하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많은 지식인들이 여기에 저항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특히 경북에 연고를 둔 사대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목은 이색은 조선 건국세력에 반대하다 직첩을 박탈당하고 평민으로 강등되어 유배당하는 고초를 겼었고, 포은 정몽주는 선죽교의 붉은 넋으로 산화하였으며, 도은 이숭인은 유배 길에 장살 당했고, 야은 길재는 향리에 은둔함으로써 후일 사림의 사표가 되었다.

 한편, 세조의 왕위 찬탈은 또 다른 방식으로 경북의 정신문화에 중요한 토양을 뿌렸다. 당시 의식 있는 사대부들이 찬탈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은둔을 택하면서 경북을 비롯한 영남지역으로 대거 낙향한 것이다. 현재 경북지역 유력문중 입향조들이 해당 지역에 터를 잡은 때가 대체로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도촌 이수형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도촌은 고려가 망하자 마찬가지로 순흥으로 낙향하였던 퇴은 이억의 5세손이다. 17세에 처음 벼슬에 나아가, 21세 때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올랐다. 이때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계유정난이 발생하자 벼슬을 미련없이 버리고 처가가 있는 순흥으로 낙향하여 도촌(현재의 사제마을)에 은거하였다.

 당시 이수형은 조정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평시서령이라는 벼슬은 시장에서 사용되는 도량형과 물가를 감독하는 관청인 평시서의 책임자이다. 요즘으로 치면 기획재정부의 물가업무 담당 과장 정도의 직책이다. 나름의 중요성은 있지만 결코 정권의 명운과 관련된 요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자리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도촌의 은둔은 정권의 부도덕성에 타격을 가할 만큼 파괴력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도촌은 당시 벼슬에 그냥 눌러앉아 있어도 비난받을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벼슬을 던지고 표표히 낙향하였다. 이런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도촌의 은둔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평가나 어떤 공리적인 효과를 염두에 두고 행한 선택이 아니라, ‘옳음’ 그 자체 대한 내면의 도덕적 요청에 대해 스스로 응답한 결과이다. 도촌은 그런 행동을 통해 ‘옳음(是)’과 ‘그름(非)’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은 나중의 문제이다.

 동양의 고전인 ‘주역’이 은둔을 뜻하는 둔괘(遯卦)에 대한 설명에서 군자가 은둔하는 것은 소인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엄정함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모든 절의지사들의 경우가 그렇듯, 도촌의 은둔 역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충실하고자 한 실존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도촌의 그러한 절의 정신은 낙향한 뒤 거처할 집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그는 마을의 일반적인 택향(宅向)인 동남향을 버리고 집의 방향을 서북으로 향하게 하여 2칸반 누옥을 지은 뒤 삼면을 막고 오직 그 서북향으로만 앞을 틔웠다.

 그 방향은 바로 살아서는 청령포에 유폐되었고 죽어서는 말단 관리의 손에 몰래 거두어져 동을지산 자락에 쓸쓸히 묻혔던, 단종의 원혼이 깃들어 있는 영월 방향이었다. 도촌은 결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신의 일편단심을 은거지에서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도촌은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 때문에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도촌이 사제마을에 낙향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상감사를 시켜 여러 번 하사품을 보내며 회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촌은 이에 일절 응하지 않았음은 물론, 이후 죽을 때까지 70여년 동안 결코 한양땅을 다시 밟지 않았다.

 뒤에 영남의 선비 눌은 이광정은 도촌이 살던 거처에 북쪽을 향한 일편단심의 집이라는 뜻에서 ‘공북헌(拱北軒)’이라는 편액을 걸고, 시 한 수를 남겨 그의 절의를 기렸다.

 네모난 방은 반(盤)처럼 작은데
 문을 열면 보이느니 영월의 산뿐
 단종의 복위는 언제 이루어지려나
 두견새 소리만 깊은 밤 홀로 차가워라

 도촌의 절의와 관련해서는 또 다른 일화도 전해온다. 도촌이 공북헌에 거주할 때 손수 회나무 한 그루를 심고 그것을 벗삼아 시름을 달래며 살았다. 그런데 그가 죽자 함께 고사되었다가 뒤에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지금도 공북헌 주위에 커다란 회나무가 자라는데, 이는 한국전쟁 뒤에 원래 나무의 뿌리에서 새로 싹이 튼 후손나무라 한다.

 도촌의 절의가 깃들어 있는 이 회화나무는 지금도 단종이 사약을 받자 모시던 시종들이 영월 동강에 몸을 던진 곳이라 알려진 ‘낙화암’에서 이름을 딴 개천 하나를 마을 너머로 굽어보며, 세월의 침식에도 퇴색되지 않는 도촌의 붉은 마음 한 조각을 오늘까지 전한다.

/박원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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