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경주 최부자집
⑨ 경주 최부자집
  • 박원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 등록일 2011.03.24 19:54
  • 게재일 2011.03.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나라 종가문화의 역사는 조선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이 건국되자 당시의 정치적 격랑을 피해 중앙의 관료들이 사직이나 실각 등의 형태로 벼슬에서 물러난 후, 연고를 좇아 새로운 보금자리로 낙향하여 이른바 입향조(入鄕祖)로 속속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그 출발점이다. 이어 주자성리학이 성숙기로 접어드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그렇게 뿌리 내린 세족 가문에서 불천위로 추대되는 인물들이 하나둘 나타나면서 본격적으로 종가문화가 형성된다.

하지만 짧다면 짧은 종가문화의 역사 속에서도 가진 자의 사회적 책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종가는 많다. 그 가운데 특히 한두 대가 아니라 누대에 걸쳐 우리 종가문화의 품격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인 가문으로 경주 최부자집이 있다.



최부자집은 신라시대의 대학자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하는 경주최씨의 지파 가운데 하나인 가암파(佳巖派)에 속한다.

가암파는 병자호란 때 순절한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 1568~1636)을 파조로 하는 문중이다.

최진립의 부친이 처가인 가암촌(경주 내남 이조 마을)으로 이주한 후 대대로 거기서 세거하였기 때문에 가암파라 불린다.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봉해졌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70을 바라보는 나이를 무릅쓰고 참전하였다가 용인전투에서 순절한 인물이다.

300년 12대에 걸친 만석꾼 집안으로 유명한 최부자집은 뒤에 이 가암파의 후손인 최기영(崔祈永)이라는 인물이 이조를 떠나 경주 교동에 있는 향교 옆으로 이주하여 가세를 이어갔기 때문에 흔히 `경주 교동 최부자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최부자집이 실천한 사회적 책임의식 내용을 엿보기 위해서는 이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온 가훈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최부자집에는 모두 여섯 조목으로 된 가훈이 전해온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 것, 재산을 모으되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 것, 손님을 후하게 대접할 것, 흉년에는 다른 사람의 전답을 매입하지 말 것, 집안 며느리는 시집 온 지 3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을 것,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가훈을 관통하는 정신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는 지나친 권력 혹은 명예욕에 대한 경계이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가훈이 이에 해당한다. 벼슬이 너무 높아지면 붕당에 휩쓸려 집안을 그르칠 우려가 있으므로 양반으로서 처신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격 조건인 진사에만 머물라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가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사람이면 누구나 추구하게 마련인 재력과 권력과 명예에 대해, 이는 둘도 많으니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했던 선현들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때문이어선지 최부자집 후손들은 실제로 내리 9대가 진사만 지냈다.

둘째는 지나친 물욕에 대한 경계이다.

`재산을 부지런히 모으되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는 가훈을 통해 이를 엿볼 수 있다. “만족한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는 없다”는 말에서 보듯이, 예나 지금이나 지나친 물욕은 자신은 물론 결국은 집안까지 망하게 하는 재앙의 씨앗이다. 따라서 이 가훈은 물욕에 대해 스스로 금도를 설정할 줄 아는 최부자집의 통찰을 보여준다. 3대를 넘기기 어렵다는 부자를, 그것도 만석꾼으로 내리 12대를 지속한 데에는 이런 비결이 있었던 것이다.

셋째는 앞의 문제의식과도 연결되는데, 바로 엄정한 자기 절제력이다.

명예와 재물에 대한 지나친 추구를 경계하는 자세는 고도의 자기 절제력을 전제로 한다. 최부자집의 그런 절제력을 `집안 며느리는 시집 온 지 3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어라`고 한 가훈에서 물씬 배어난다. 낮출수록 오래간다는 역설을 간파한 가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는 또한 스스로를 낮추는 겸양의 정신과도 통한다.

넷째는 가장 중요한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다.

이는 최부자집을 진정 최부자집답게 만든 핵심적인 요소이다. 만약 최부자집이 단순히 12대에 걸친 만석꾼 집안에만 머물렀다면 아마 전승해 온 뛰어난 재테크 기술로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부자집은 그것을 넘어 자신의 부를 적극적으로 사회로 되돌림으로써 진정한 명가의 반열에 올랐다.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은 사대부가면 누구나 겪고 치르는 연중행사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가훈은 별로 새로운 것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꺼번에 유숙하는 손님이 때로는 100여명이 넘기도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최부자집은 그처럼 많은 손님이 오더라도 결코 박절하게 대하는 법이 없었고, 유숙할 곳이 모자라면 노비들 집에라도 보내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때 이들이 먹을 양식을 딸려 보냈음은 물론이고, 주인을 대신하여 손님을 접대하게 된 노비에게도 소작료를 면제해주는 등의 응분의 보상을 해주었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한 가훈 역시 이렇듯 자신의 부를 사회에 적극적으로 되돌리려는 책임의식의 발로였다.

`흉년에는 다른 사람의 전답을 매입하지 말라`는 것 역시 최부자집의 배려 정신이 돋보이는 가훈이다. 동시에 이는 적어도 남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지는 않겠다는 자존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상대의 곤경을 이용한 적대적 인수합병이 비일비재한 오늘의 기업환경을 되돌아보게 하는 가훈이 아닐 수 없다. 최부자집의 12대에 걸친 만석꾼의 영예는 바로 이와 같은 자기절제와 배려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최부자집의 실천의식은 나라를 잃은 일제 강점기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후손인 최준(崔浚 : 1884~1970)이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 1885~1943)와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한 것이 그 예이다.

최준은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백산상회의 운영자금을 대부분 도맡아 책임짐으로써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가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을 어김없이 실천에 옮겼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는 남은 전 재산을 희사하여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교육입국에 기여함으로써 마지막까지 종가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였다.



/박원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