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 ……………………………………………………………………………………… 정지용

백일치성(百日致誠) 끝에 산삼(山蔘)은 이내 나서지 않었다 자작나무 화툿불에 화끈 비추우자 도라지 더덕 취싻 틈에서 산삼순은 몸짓을 흔들었다 심캐기 늙은이는 엽초(葉草) 순쓰래기 피어 물은 채 돌을 벼고 그날 밤에사 산삼이 담속 불거진 가슴팍이에 앙징스럽게 후취(后娶) 감어리처럼 당홍(唐紅) 치마를 두르고 안기는 꿈을 꾸고 났다 모탯불 이운 듯 다시 살어난다 경관(警官)의 한쪽 찌그린 눈과 빠안한 먼 불 사이에 총(銃) 겨냥이 조옥 섰다 별도 없이 검은 밤에 화약(火藥)불이 당홍(唐紅) 물감처럼 고왔다 다람쥐가 도로로 말려 달어났다

현대시가 난해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감성보다 지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현대시가 난해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난해함은 시가 발표되었던 당시에는 상식이 되다시피 한 배경 지식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도 시간이 지나 아는 사람이 없어지면 희한하고 난해한 지식이 되는 것이다.

정지용의 `도굴`이라는 시도 난해한 시로 다루어져 왔다. 이 작품 속의 사건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심캐기늙은이, 즉 심마니 노인이 산삼을 캐러 나섰다가 산삼을 그 곁에 둔 채 경관의 총에 사살된다는 것이다. 심마니 노인이 경관의 총에 사살되는 것이 제목 `도굴`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가 시 해석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도착점이 된다. 그 관계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난해시로 불리게 된 것이다.

`도굴`과 총격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기존의 해석자들이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는 문화재범죄로서의 도굴이 총격을 가할 정도의 중대한 범죄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는 물론 현재도 도굴범에 대하여 징역 이상을 넘어서서 사형이나 그에 준하는 정도로 처벌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경관이 심마니 노인을 사살한 것은 현행법상 현실적인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선입견을 제거하고 지금의 독자가 놓친 당대의 사회적 맥락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문학 연구자가 때로는 탐정과 닮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이 작품의 생성 배경이다. 이 작품은 정지용이 금강산을 여행한 후에 금강산에서 얻어들은 이야기를 소재로 취한 작품으로 보인다. 그리고 `도굴`이라는 말이 또다른 실마리가 된다. 우리가 아는 도굴은 보통 무덤을 파서 문화재를 훔치는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광물을 몰래 캐내는 것도 도굴이라고 했다. 지금 사전에도 두 가지 뜻이 모두 들어 있다.

`금강산`, `도굴`이란 단어가 이 작품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된다. 이 단어들을 염두에 두고, 신문과 잡지를 뒤진 결과, 놀랍게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금강산 중석 도굴사건`이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1938년 중반에만 해도 금강산 전역에 매일 5000여명의 도굴꾼들이 출몰하였으며, 여기에서 반출된 중석이 모이는 경성 매광소의 하루 거래량이 30여 톤이나 되었다고 한다. 국내 언론의 요구가 거세지고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로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총독부는 1938년 7월15일에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당시 중석 도굴꾼을 검거하기 위해 파견된 수많은 일제 경찰들은 실적을 올리고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기 위해 무리한 검거활동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문에 따르면 경찰의 단속이 강화되자 도굴꾼들은 경찰의 눈을 피하여 관솔이나 등으로 불을 밝히고 야간에 주로 작업을 하였다. 경찰들은 험한 산중에서 열악한 여건 속에 잠복근무를 했기 때문에 도굴꾼을 잡기 위해 총격을 가하는 일도 불사하였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작품에 등장하는 노인의 화툿불은 도굴범의 관솔불로 오인될 가능성이 높다. 경관들의 눈에 캄캄한 금강산 산중에서 멀리 보이는 불빛은 도굴 범행현장의 표지에 불과했다. 험한 산중에서 가까이 접근하여 도굴범을 체포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총을 쏘아 위협하거나 사살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작품에서 노인의 죽음은 바로 일제 경찰이 노인을 중석 도굴꾼으로 오인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작품을 읽으면 모든 상황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41년 1월은 금강산 중석 도굴사건이 완료되어 가던 시점으로, 많은 사람들은 몇 년에 걸친 보도를 통해 이 사건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정지용이 이 작품을 발표했을 때 독자들은 이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은 몰라도 대충 어떤 사건을 말하는지는 짐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금강산 중석 도굴사건이 잊혀 이 작품의 사회적 맥락이 공유되지 않으면서 이 시는 난해해졌던 것이다.

이 작품은 일제 경찰의 민간인 오인 사격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다루면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한 시로서, 억압적인 시기에 비판인식과 문학성을 잘 갖추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민감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이 검열이 심해진 1941년에 발행된 시집 `백록담`에서 누락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경북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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