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의 고향 `사도실마을`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의 고향 `사도실마을`
  • 윤희정기자
  • 등록일 2011.03.10 19:32
  • 게재일 2011.0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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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서원.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마을에는 우리 나라 독립과 민주화 운동에 심혈을 바친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1879~1962) 선생의 생가, 청천서원, 청천서당 등 동강 김우홍과 그 후손들의 흔적이 있다.

팻말이 붙은 입구 길에서 조금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청천서원, 그리고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다 왼쪽으로 꺾어들면 김창숙 선생의 생가가 있으며 앞으로 곧장 보이는 건물이 청천서당이다.

성주군 대가면에서 태어난 김창숙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유림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관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활약했으며 광복 이후 야당정치인으로 활동하다 성균관대 개교에도 노력했다.

본관이 의성인 심산 선생은 조선 선조 때의 명신이며 학자인 동강 김우옹의 후손으로 어려서 유학을 배웠고 문장에 능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던 심산은 이 사건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고 1909년 고향인 성주에 성명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키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성명학교 교사(校舍)는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 있는 지금의 청천서당이었다.

청천서당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선생의 생가가 있다. 선조로부터 세거해 온 전래의 건물은 모두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의 안채 건물은 1901년에 중건한 것. 장방형 토석담을 두른 터에 안채와 1991년에 건립한 사랑채, 판각고(板刻庫) 등이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생가는 선생이 22세 되던 해에 화재를 당해 1901년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전 건물을 언제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선조 대대로 살아온 것으로 보이며 고종 16년(1879)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선생은 심산 외에도 벽옹이란 호를 갖고 있다. 앉은뱅이 노인이란 뜻. 일제의 고문에 의해 불구의 몸이 된 후 벽옹이란 호를 갖게 됐다. 대구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던 선생은 오히려 웃으며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며 종이와 붓을 달라고 해서 시를 써줬다. “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에/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뇌락(落·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음)한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한데/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

청천서원은 고종 5년(1868) 9월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으며, 그 후 청천서당이 됐다가 1992년 이곳에 다시 복원됐다. 건물의 청천서원이라는 현판은 백범 김구가 쓴 글씨라한다.

청천서원을 지나 다시 골목길을 따라가면 곧장 보이는 건물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1호 청천서당이다.

이 건물은 원래 청천서원의 후신이라한다. 서원철폐령으로 청천서원은 철폐되어, 동강의 12대손인 김호림, 심산의 아버지가 종택의 사랑채를 청천서당으로 꾸민 것이 현재에까지 이른 것이라 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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