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멸망 애도 `不事二君`선택 은거
학문 정진하며 쟁쟁한 후학들 배출

구미 금오산 입구, 아름다운 계곡 옆에 무상한 세월에도 바래지 않은 기상을 풍기는 몇 채의 건물이 있다.

건물로 가는 초입에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로 시작되는 시조를 새긴 시비(詩碑)가 있어 이곳이 고려말의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관련이 있으며, 또 `채미정(採薇亭)`이라고 새긴 돌을 통해 이 건물군을 대표하는 이름이 채미정임도 알 수 있다.

입구를 지나면 마치 속세와 성지를 구분하는 듯,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놓여 있다. 돌 다리 앞에는 고색창연한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어 채미정이 지닌 권위를 실감케 한다.

다리를 건너 건물로 들어가면 1768년(영조 44)에 선산 선비들이 길재를 추모하여 지은 채미정과 구인재, 그리고 길재 영정과 숙종의 친필 액자가 모셔진 경모각, 길재가 은거한 곳임을 알리는 길재선생유허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유허비`를 통해 채미정이 고려의 멸망을 애도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택해 길재가 은거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마비와 국왕의 친필 등을 보아 조선 정부는 길재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길재는 조선을 거부하고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거를 택했던 사람이다. 어찌 보면 조선정부로서는 괘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길재의 선택과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한 조선정부의 평가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심지어 조선을 건국한 초창기부터 길재의 충절은 높이 평가받았다. 태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401년 권근은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킨 정몽주, 김약항(若恒), 길재 등을 포상하여 조선왕조에 절의의 규범을 확립하는 길을 열자고 제안하였다.

세종은 `불사이군`의 지조를 택한 길재를 인정하고 자손들을 포상하였다. 1430년(세종 12)에는 정몽주와 함께 길재를 한국 역사를 대표하는 충신으로 선정하였다.`삼강행실도`충신도에 두 사람만이 그 이름과 행적을 올린 것이다. 정몽주는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으로, 길재는 고려를 위해 절개를 지켰다는 이유였다.

1570년(선조 3)에는 금오산 자락에 길재의 충절을 기리는 금오서원을 세웠고, 1575년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금오서원은 제외되었다. `충절의 화신` 길재를 모시는 금오서원만은 흥선대원군마저도 차마 없앨 수 없었던 것이리라. 이외에도 숙종은 길재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의 글을 직접 써서 내렸고, 영조와 정조도 길재의 제사를 맞아 친히 제문을 내리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에 동조했던 세력마저 존경했던 이가 곧 길재였다. 600년의 시공을 격한 지금까지도 조선사람들이 길재에 대해 지녔던 존겸의 염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채미정을 거닐며 그러한 길재 선생의 삶을 돌아보는 것도 또다른 즐거움을 줄 것이다.

길재는 1353년(세종 12) 경상도 선산 봉계리에서 태어나 1419년(세종 1)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그는 어린 시절 매우 어려운 여건에서 생활하였지만, 주경야독하며 학문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18세 때 상주의 박분(朴賁)을 찾아가 사사하였고, 박분을 따라 송도에 가서는 이색, 정몽주, 권근 등에게 사사하였다.

이때 길재의 인품과 학문은 스승이었던 권근의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권근은 사람들에게 평하기를, “나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학문을 하는 이들이 몇 있지만 길재가 그 가운데 독보적이다”라고 하였다. 사실 권근과 길재는 한 살 터울이었다. 하지만 권근은 명문가에서 자라 15세에 성균관에 합격하는 등 일찍부터 학문의 길이 트였다. 반면 길재는 어려운 환경 탓에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국자감에 들어가는 등 학문에 들어가는 것이 좀 늦었다. 그래서 길재가 국자감에 들어갔을 때 교관이 권근이었고, 한 살 터울의 둘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길재는 권근을 진정한 스승으로 여겨 심상(心喪) 3년을 입을 정도였다. 반면 권근은 그를 친구로 대했고 만년에는 그의 지조를 우러러 선생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연치를 잊고 서로를 존경하며 스승이자 친우로 지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보는 이후에 달랐다. 권근은 조선 건국에 적극 동조하였다. 반면 35살의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오른 길재는, 위화도 회군 이후 급격하게 쇠퇴의 길에 접어든 고려의 현실에 갈등하였다. 그리고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작정하고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구실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갔다. 38살이라는 젊은 나이였고, 관직 생활은 기껏 4년이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고 그에게 몇 차례 관직이 내려졌지만, 모두 거부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후진을 양성하는 데 전력하였다.

물론 길재가 조선의 건국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태종과 길재는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그리고 태종은 `길재는 강직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평가하면서, 은거 중인 그를 불렀다. 길재가 올라오자 태종은 길재를 정종에게 추천하여 태상박사에 임명하게 하였다. 그러나 길재는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지 않고, `불사이군`의 의리 때문에 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반면 세종 때 길재의 아들 사순(師舜)이 국왕의 명령으로 서울에 가자, “내가 고려에 향한 마음을 본받아 너는 조선의 주인을 섬겨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이를 보면 길재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열린 것도 필연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에 강하게 반발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고려의 신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왕조에 설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고려에 충절을 지키며 은거하였다. 대신 조선의 동량이 될 수 있는 학자를 양성하는데 전력하는 한편, 자신의 후손에게는 고려의 백성이 아니라 조선의 신하이기 때문에 조선에 충절을 다하도록 독려하였다. 학문의 전수뿐 아니라, 스스로 성리학의 중요한 가치인 충절을 실천하는 행동으로도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렸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김숙자를 비롯한 훌륭한 선비와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 출신이고, 영남 인재의 절반은 선산 출신이다”라는 말이 일세에 풍미하기도 하였다. 또 길재 본인은 정몽주를 이어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이은 사람으로 평가되었고, 후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채미정`이라는 정자 이름에서 암시하듯, 백이숙제를 본받아 조선의 녹을 받지 않고 고사리를 캐먹는 것으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려 했던 길재의 풍모, 그리고 그 가르침이 새삼 그립다.

/이욱(한국국학진흥원 고전국역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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