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의 사랑, 정사(情死)의 사상

<호랑나비> ……………………………………………………………………………………… 정지용

화구(畵具)를 메고 산을 첩첩 들어간 후 이내 종적이 묘연하다 단풍이 이울고 봉마다 찡그리고 눈이 날고 영(嶺) 우에 매점(賣店)은 덧문 속문이 닫히고 삼동(三冬) 내 - 열리지 않었다 해를 넘어 봄이 짙도록 눈이 처마와 키가 같었다 대폭(大幅) 캔바스 우에는 목화송이 같은 한 떨기 지난해 흰 구름이 새로 미끄러지고 폭포소리 차츰 불고 푸른 하늘 되돌아서 오건만 구두와 안신이 나란히 놓인 채 연애가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날 밤 집집 들창마다 석간(夕刊)에 비린내가 끼치었다 박다(博多) 태생 수수한 과부(寡婦) 흰얼골이사 회양 고성 사람들 끼리에도 익었건만 매점 바깥주인 된 화가는 이름조차 없고 송화가루 노랗고 뻑 뻑국 고비 고사리 고부라지고 호랑나비 쌍을 지어 훨 훨 청산을 넘고

1941년 1월에 발표된 정지용의 `호랑나비`는 추리소설이나 수수께끼와 같은 서술 방식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첫 구절부터 화구를 메고 산을 들어간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영 위의 매점 이야기로 전환되고, `연애가 비린내를 풍긴다`는 말도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그러나 앞뒤 상황을 종합해보면 환하게 뜻이 드러난다.

이 작품은 하나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의 전모는 이렇다.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화구를 메고 산에 들어간다. 그 산은 회양, 고성이라는 지명으로 볼 때 금강산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금강산의 어느 매점 주인인 과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정사(情死), 즉 동반자살을 한다. 그리고 봄이 되어서야 그 죽음이 알려져서 석간신문에 실리게 된다. 매점 주인인 여자는 박다(博多), 즉 일본 하카다 출신 과부이지만 남자의 신원은 밝혀진 바 없다.

이 시가 다루고 있는 정사는 당시에 신문지상에서 종종 만나는 사건 중의 하나였다. 정사 중에도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23년 기생 강명화와 지방 부호의 아들 장병천의 정사다. 남자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어렵게 되자 강명화가 먼저 죽고, 그녀의 죽음 4개월 후에 남자도 죽게 된다. 강명화의 미모와 순수함이 이 사건을 전설처럼 만들어 이후 소설, 영화, 음악 등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아마도 언론에 가장 많이 다루어진 사건은 1926년에 있었던 극작가 김우진과 성악가 윤심덕의 정사일 것이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오는 연락선에서 간단한 메모만 남기고 사라진 두 사람. 이들이 조선을 대표하는 유명한 예술가라는 점에서 이들의 정사는 세상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이후 윤심덕이 남긴 노래 `사의 찬미`는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며 그 사건을 더욱 신화화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에 정사는 주로 비판의 대상이었다. “현대 조선에 전날에는 보지 못하던 현상이 하나 생겼으니, 이것은 소위 남녀의 정사이다. 신문지의 보도를 보면 거의 날마다 정사 사건이 일어난다.”(성동생, `소위 정사`, 1929)며 사회풍조를 언급하며, 정사는 “도덕에 대한 최후의 반역이며 발악”이며, “적극적으로 하등의 의미가 없”는 것으로 비판한 글들이 주류였다.

1930년에 들어서 정사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선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노천명,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등의 좌담이다. 당대 대표적인 여류 문인이었던 이들은 노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사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보여주었다. 모윤숙의 다음과 같은 말이 대표적이다.

“현실 위에서는 그 사랑이 아무리 하여도 성취할 길이 없는 바에는 즉 영육일치(靈肉一致)의 완전한 또 장구한 연속성 있는 사랑을 구할 길 없는 경우에는, 육체의 쾌락이 없는 정신적 영적 애정만이라도 찾기 위하여 정사나 자실의 길로 달아나는 것이겠지요.”

정사를 정신적 영적 애정, 즉 순수한 애정을 실현하는 한 방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정지용의 `호랑나비`도 이런 시선을 반영하고 있다. 과부와 화가의 정사가 낭만적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사랑에 대한 관점도 유효기간이 지났다. 정사의 시대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던 순수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폄하된다. 우리 시대의 정사는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성의 논리로 폐기된다. 우리 시대는 경제적 매력이 사랑의 매력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시대이다. 이때 사랑은 자본의 흐름을 조율하는 일종의 경제적 행위인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정지용의 시는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경북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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