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 침탈 일제에 맞서 `자정순국`한 올곧은 선비

지난 해가 경술국치 100주년으로 나라를 잃은 치욕을 기억하는 시간이었다면, 금년은 수많은 지사들이 국권회복의 설욕을 위해 만주로 독립의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거사의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치욕의 끝과 설욕의 시작 한 가운데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의 자정순국(自靖殉國: 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있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은 엿새를 돌아 9월4일 향산 이만도가 은거하고 있던 일월산 자락의 궁벽한 산골에도 찾아들었다. 이에 이만도는 일찍이 을미사변이나 을사늑약 체결의 치욕에도 한 줄기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해 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품을 여지가 없어졌다고 탄식하며 나라의 죽음에 함께 할 각오를 세우게 된다. 이로부터 13일후인 9월17일 이만도는 안동 예안 청구동의 큰 조카 집으로 옮겨와 다음날 아침부터 곡기를 끊는 것으로 자신의 각오를 실천에 옮긴다. 국권을 침탈한 일제에 대한 목숨을 던지는 항거이자, 역사와 사회에 대한 선비의 책임을 목숨으로 갚으려는 거룩한 실천이었다.

경술국치 당하자 단식 24일만에 장렬하게 순국

향산 후손·가족들도 잇따라 항일독립운동 나서

향산은 퇴계 이황의 11세손으로 도산서원 너머 퇴계종택에서 낙동강 쪽으로 조금더 다가가면 만나는 하계마을에서 이휘준(李彙濬)의 둘째로 태어나 막내숙부인 이휘철(李彙澈)의 양자가 되었다. 14세 되던 해인 1956년 생부인 이취준이 과거에 급제하자 선조들의 빛나는 위업에 뒤지지 않기 위해 배움을 통한 입신할 것을 각오하고 학문에 전념한 결과 10년이 지난 1866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는 영예를 누린다. 이후 이만도는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병조와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 등의 내직과 외직으로 양산군수 등을 두루 거쳐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공조참의와 승정원 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양하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벼슬에의 뜻을 접고 고향에 내려와 백동서원(栢洞書院)을 짓고 자신의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서세동점과 일제침략 노골화라는 광풍이 초래한 도가 사라진 불행한 시대는 궁벽한 안동의 예안에서 나고 자라 `전국 수석`으로 관로에 나섰던 그에게 평탄한 경세가로서의 영예의 길은 물론이고 학자와 교육자로서의 행복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도한 시대는 뜻과 의지가 깊은 선비에게 깊은 산속으로 은둔해 맹자의 말처럼 자신의 한 몸을 선하게 닦으며 도를 보존해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삶과, 엄습한 부정과 불의에 몸으로 저항하며 현실을 바로잡는 삶을 선택할 것을 재촉했다.

이만도는 두 가지의 길 중에서 현실로 나아가 맞서기를 선택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소식을 접하고 이듬해 대장의 직책을 맡아 일으킨 예안의병과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접하고 올린 을사오적을 참할 것을 주장하며 올린 상소 등은 그러한 선택에 의해 나선 무도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견위수명(見危授命)의 결연한 실천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실천의 몸부림은 1910년 경술국치에 의해 무위로 끝나고 만다. 일찍이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 하고 나서 즐거워하는` 선비의 길을 배움과 실천을 통해 걸으려 했던 이만도에게 이제 남은 선택은 목숨을 바쳐 불의에 항거함으로써 배운 사람으로서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갚는 것이었다. 곡기를 끊어 스스로 죽음으로써 나라의 죽음과 함께 하려고 한 것은 그러한 선택의 길이었다.

그러한 선택의 시작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그의 주변 사람이 기록한 `청구일기`에서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죽음을 택한 생각은 음식을 물리치기 시작한 다음과 같은 9월17일의 기록에 잘 나와 있다.

내가 나라에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도 을미년의 변란에 죽지 못하고 또 을사년의 5조약 체결에도 죽지 못하고 산에 들어가 구차하게 연명한 것은 그래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이미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어졌는데 죽지 않고 무엇을 바랄 것인가? 변란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지금까지 지체하고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은 자진할 방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뜻이 정해졌으니 명동에 들어가서 생을 다하고자 한다. 다시는 여기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과연 그의 각오대로 그를 아끼는 벗과 친척들이 함께 단식하며 만류했지만 그의 결연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곡기를 끊은지 오래되자 기력이 쇠하고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21일째 접어드는 10월7일에는 그의 죽음이 가져올 후과를 두려워한 일본 경찰이 가족들을 위협하며 정신이 없을 때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이도록 했지만 이만도의 뜻을 받드려는 가족들은 그러한 위협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일경이 나서서 강제로 미음을 먹이려 하자 이미 죽음에 이르러 기력이 쇠진해 있던 이만도는 “나는 명대로 자진하고자 하는데, 지금 너희들이 나를 빨리 죽이고 싶은가? 내 빨리 죽고 싶으니 즉시 총포로 나를 죽여라”고 창문을 열고 가슴을 내보이며 소리를 꾸짖었다. 그러던 그는 10월10일 단식 24일째에 이르러 마침내 그의 바람대로 장렬하게 나라의 죽음에 함께 하게 되었다.

그의 숭고한 죽음은 제자와 친족, 그리고 이 지역의 유학자 등 남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사후 안동지역에서 10여명이 일제에 항거해 순국했고 특히 가까운 친척인 이동언(李東彦), 을미의병의 동료이자 제자였던 김도현(金道鉉)은 각각 단식과 투신으로 순국의 길을 택했다. 특히, 그의 결연한 의지와 당부로 인해 죽음을 만류할 수 없었던 자식들에게 그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가족들은 그의 뜻을 이어가는 것으로 아픔을 극복하고자 했다. 동생 이만규는 의병에 참여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했으며, 아들인 이중업은 남은 생애를 항일투쟁의 길에 헌신했다. 시아버지의 순국과 남편의 항일투쟁에다 두 사위의 독립운동을 지켜본 며느리 김락은 여자의 몸으로 독립운동에 나서 1919년 예안의 3·1운동을 이끌다 일본 수비대에 끌려가 고문으로 실명을 하였다.

누군들 자신의 목숨을 세상의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겠으며, 가족의 편안함을 바라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희생해서라도 옳바른 길을 걸어가려는 것은 현실의 이해를 넘어서고 때로는 생명의 소중함을 넘어서는 사람의 길, 사람의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 이익과 욕망의 추구가 넘쳐나는 요즈음의 세태에 향산 이만도의 삶과 죽음의 길은 더욱 소중한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그의 장렬한 죽음의 기록인 `청구일기`의 배경이 된 안동 예안의 청구동에는 광복 후 정인보가 그의 행적을 짓고 김구가 비문의 제목을 쓴 `향산이선생순국유허비(響山李先生殉國遺墟碑)`가 세워져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박경환(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향산고택과 인근의 가볼만한 곳

안동의 3대 독립운동 가문 이만도 선생의 옛집

△향산고택

3대에 이어진 독립운동 가문의 고택인 향산고택(響山古宅·사진). 향산고택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울분에 단신으로 항거하다 순국한 향산 이만도 선생의 옛집이다.

고택은 단출하다.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고 깔끔하다.

안동시 안막리에 있는 향산고택은 본디는 퇴계의 묘소에서 가까운 하계(下溪) 마을이 진성이씨 집성촌이자 향산 이만도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았던 마을이다.

그곳에 있는 향산의 고택은 안동댐이 건설돼 마을이 온통 수몰되자 집을 통째로 옮겨 안동시 안막리에 다시 세웠다.

해마다 40~50명의 전국 선비들이 모여 퇴계의 학문을 논하고 향산의 의혼을 말하면서 향산고택의 향기는 온 나라로 퍼져나간다.

물속에 잠긴 옛날의 터전이야 찾을 길 없고, 이제는 향산의 유적지라고는 `청구비`와 `묘소`와 고택이 있을 뿐이다.

비록 퇴락한 옛날의 기와집이지만, 방에 들어가면 이가순·이휘준·이만도 3대 문과급제 교지(敎旨)가 복사돼 벽에 붙어 있고, 이만도와 그의 아들 이중업(李中業), 그의 손자 이동흠(李棟欽) 3대 독립운동가 서훈장이 복사돼 전시돼 있다.

나라를 잃자 분통을 이기지 못하는 애국심으로 24일간 단식으로 자결한 애국자·독립운동가 이만도,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파리장서 등 온갖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이중업, 왜정 때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를 치른 이동흠, 이들 3대는 물론이려니와 이중업의 부인 김씨, 둘째 아들 이종흠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 집안에서 배출됐다.

퇴계와 향산으로 이어진 성리학적 의리개념과 애국심이 그러한 가문을 이뤘을 것이다.

향산 선생 항일순국을 기리는 가장 중요한 기념물

△이만도 순국 유허비

향산 이만도 선생의 순국을 기리는 가장 중요한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는 유허비는 시내에서 자동차로 40분 남짓 걸리는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 청구마을 앞에 자리잡았다. 유허비각 주변에는 자그마한 크기의 향산공원이 조성됐다. 1949년 세워졌다는 유허비의 앞면 글씨는 백범 김구가 썼고 뒷면의 추도사는 위당 정인보가 지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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