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어귀 비 뿌리는 전봇대 밑이거나
눈보라 흩어지는 마을의 입구 어둠을 한사코 밀어내며
자신의 몸으로 등(燈)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더디고 하찮은 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소란스럽고
번쩍거리는 것만이 마음에 등(燈)이 되는 때
만월(滿月)처럼 그렇게 은은함도 그리워지는 법이다
종루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골목의 개들도 두 발을 모은 채 귀를 내리고
풍치(風齒)를 앓는 마을도 감처럼 고요하던 때
두근거림은 영화 포스터만큼 상큼했었다
벚꽃 피는 날, 환한 날 사랑이 어떻게 갔는지
편의점 불빛은 반짝이고 저 멀리
오래 달려온 길처럼 쭈그러진 가로등
제 몸 속을 비추고 있다.
동네 어귀나 골목 입구에는 가로등이 있다. 세상의 영욕과 갖가지 일들을 고스란히 목도하고 서 있는 가로등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존재가 이닐 수 없다. 골목 안 사람들의 환희와 슬픔을 다 보아온 가로등. 시인은 그 가로등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 영욕의 세월을 거쳐 온 분탕스러웠던 지난 생애를 조용히 돌아보는 시인의 마음이 겸허하게 다가오는 아침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