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끝나면 봉사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겠다”

경북 포항출신의 하인국(58·사진) 하나로저축은행장은 동해면 중흥리에서 태어났다. 하 행장은 동해면에 있는 흥환초등학교, 구룡포중학교와 포항 동지상고를 거쳐 포항1대학과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특히 서울에 있는 포항출신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당발로 소문이 나 있다. 포항출신 출향인들끼리 교류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직접 모임을 만들어 회장을 맡았던 데다 재경포항향우회 사무총장으로서도 오랫동안 봉사해왔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군수를 꿈꾸었던 하 행장은 사회생활을 공무원으로 시작해 한때 경북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군부정권 당시 유신사무관들이 고위공무원으로 영입되는 것을 보고 실망한 그는 지난 1982년 사조산업에 공개특채되면서 새로운 길을 걷게됐다. 그가 저축은행과 인연을 맺은 것은 사조산업에 입사한 지 1년여만이었다.

당시 1차오일쇼크로 인한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사조산업 계열사인 푸른저축은행이 부실화돼 이를 정상화시키라는 명을 받고 푸른저축은행에 입사한 것이다.

입사이후 하 행장은 특유의 근면, 성실, 그리고 열성으로 매년 승진을 거듭해 만 45세의 나이에 최연소저축은행장에 올라 지난 2009년까지 10여년을 푸른그룹에서 저축은행장으로 재직해왔고, 지난 해 5월 푸른그룹을 떠나 하나로저축은행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하 행장이 푸른저축은행에 몸담을 때는 당시 217개 저축은행중에서 20위 정도 되는 규모였던 것이 하 행장이 맡은 뒤 매출액 기준으로 저축은행중 전국 3위, 단기순익은 3년동안 전국 최고를 기록했다. 그래서 최우수 저축은행으로 선정이 돼서 표창을 2년 연속받기도 했다. 하 행장은 지난 해 30년동안 몸담았던 푸른그룹의 푸른저축은행을 떠나 하나로저축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행장실에서 만난 하 행장은 아직도 의욕과 열정에 가득찬 모습이었다.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나.

◆어릴때는 군수나 시장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는 데, 당시에는 시장·군수가 임명제였기 때문에 본인이 열심히 일하면 시장도 할 수 있겠다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 군인출신들이 사무관으로 특채되는 제도인 유신사무관제도가 생기면서 이같은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진로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사조산업에 입사를 하면서는 전문경영인으로서 사장이 되는 꿈을 꿨다. 그래서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내가 목표한 것은 어느정도 달성했다.

-푸른저축은행을 운영하면서 어려웠던 일이 있었다면.

◆1997년쯤 푸른저축은행에서 대양저축은행을 인수하기 위해 계약을 했다가 어렵게 계약을 파기한 일이 가장 어려웠던 일이었다. 당시 대양저축은행은 점포가 7개가 있는 대형저축은행으로서 상장까지 돼 있었고, 푸른저축은행은 대양을 인수해 전국 점포망을 만들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실사결과 예상보다 숨겨져 있는 잠재부실이 워낙 많아서 계약을 이행했을 때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그때 3개월간에 걸쳐 하루 2시간도 채 못 자는 강행군을 거듭하며 300여명이 넘는 비상대책위 노조원들과 협상을 해서 계약을 파기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계약을 파기시키지 못했으면 오늘날의 푸른저축은행은 존재못했을 것이다. 대양은 그 후 다른 사람이 인수했으나, 결국 부실을 이기지 못하고 파산하고 말았다.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푸른저축은행은 예전에 극성노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1999년 내가 푸른저축은행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열정적으로 경영해 매년 저축은행의 순위를 바꾸는 성과를 올렸다. 단기순익도 전국에서 가장 많이 냈다. 그래서 처우개선도 파격적으로 했다. 나는 삼성전자보다 대졸초임을 더 많이 주는, 즉 전국에서 가장 봉급을 많이 주는 은행을 만들어보자는 게 개인적인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목표로 노력한 결과 약 3년동안 전국에서 가장 봉급을 많이 주는 은행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직원들에게 좋은 처우를 해 주자, 노조와 서로 믿음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날 노조원들이 찾아와 자진해서 노조를 해산하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나와 노조위원장 및 노조간부들은 노조해산을 기념하는 파티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노조원들과 부둥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가슴 뿌듯하고, 전문경영인으로서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 때 일이 전문경영인으로 가장 보람있었던 일로 기억한다.

-하나로저축은행장은 어떻게 맡게 됐나.

◆하나로저축은행장은 공모를 했는 데, 신청자가 무려 28명이나 몰렸다. 심사위원들이 신청자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했는 데, 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은행장을 맡게 됐다. 아마도 내가 푸른저축은행을 잘 경영해 왔고, 최근에는 푸른2저축은행을 헐값에 인수한 뒤 정상화해 1200억원으로 재매각에 성공함으로써 푸른그룹에 엄청난 매각차익을 올릴 수 있게 해줬던 일들이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안다.

-하나로저축은행을 소개한다면.

◆하나로저축은행은 저축은행 중앙회가 출자한 저축은행으로서 공적인 저축은행으로 볼 수 있어 가장 안전한 저축은행이다. 그래서 부도날 수 없는 구조의 저축은행이라고 보면 된다. 더구나 기존의 부실채권을 모두 털어버리고, 4차례에 걸쳐 증자를 해 자본금 1천520억원의 우량은행으로 거듭났다. 현재 자산은 7천억원 정도며, 2-3년후에는 최고의 저축은행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재경포항향우회 일을 맡아 많이 활동한 것으로 아는데.

◆내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특히 고향을 사랑한다. 그래서 고향일이라면 내 돈을 들여서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자세로 살아왔다. 내가 처음 서울에 왔을 때는 재경포항향우회가 결속이 잘 되지 않았고, 운영도 힘들었다. 그래서 최성해 선배를 위시해 몇몇 젊은 친구들이 모여서 향우회를 잘 운영해봐야 겠다고 마음먹고, 내가 사무총장을 맡아 열심히 뛰었다. 그때 경총회장을 지낸 김창성 회장님, 신정수 장군, 두원그룹 김찬두 회장님을 향우회장으로 모셨다. 사무국장을 7년간 하며 나름대로 향우회 활성화에 힘을 보탰다.

-특히 포항출신 젊은이들의 모임을 주도했던 것으로 안다.

◆당시에 향우회를 해도 100여명정도 밖에 모이지 않았다. 또 나오는 사람들도 연령이 많은 사람들만 참석하고, 젊은 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재경 동창회에 가보면 사람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포항 동지상고를 비롯해서 포항고·포항수고·포항공고 출신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은행나무 동우회`란 모임을 만들었다. 회원은 200여명 정도였다. 이 모임에는 매월 초청 인사를 모셨는 데, 허화평 전 의원, 이인섭 청장님, 이정섭 전 청와대 경호처장, 재계에서는 태광그룹 이 회장, 그리고 두원그룹 김찬두 회장, 김창성 회장, 정계에서 이상득 의원, 그리고 신정수 장군 등이 참석해 강연을 하고, 식사를 함께 하곤 했다. 그 때 이 분들이 당시 모임에 나온 회원들의 식사비를 후원해 주곤했는 데, 이 자리를 빌어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은행나무동우회는 30대의 젊은 사람들 모임으로서 내가 초대회장을 맡았고, 부회장으로는 박승호 포항시장, 감사로는 조병현 부산지방법원장이 맡았다. 그때 모임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지금은 50대가 돼 정계나 재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고, 공조직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도 모임을 자주 하고 있나.

◆은행나무동우회는 이명박 정부 출범후 지역색이 짙어 오해를 살수 있다는 이유로 지금은 중단상태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다시 활성화될 것으로 믿는다. 그런 조직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시점에 경북매일이 `재경 포항출향인 신년교례회`같은 모임의 장을 만들어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포항사람끼리 자주 만나는 장을 마련, 젊은 사람들도 이런 모임을 통해 서로 알고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앞으로 계획은

◆지난해 로타리클럽 회장을 맡으면서 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됐다.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가 있으면 봉사할 곳이 많다는 것을 새삼 알게됐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지만, 은행장으로서의 직분때문에 봉사에 많은 시간을 쓰지는 못하고 있다. 직분이 끝나면 봉사에 더 많은 시간을 쓸 계획이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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