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향, 천년을 건너는 따뜻한 마음

경남 사천의 매향비.
<침향> ………………………………………………………………………………………… 서정주

그러니, 질마재 사람들이 침향을 만들려고 참나무 토막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내다가 육수(陸水)와 조류가 합수(合水)치는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나 자기들 아들딸이나 손자 손녀들이 건져서 쓰려는 게 아니고, 훨씬 더 먼 미래의 누군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후대들을 위해섭니다.

그래서 이것을 넣은 이와 꺼내 쓰는 사람 사이의 수백 수천 년은 이 침향 내음새 꼬옥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 뿐, 따분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없습니다.

침향은 원래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침향나무에서 채취한 나무진 덩어리로, 삼국시대부터 귀중한 수입품의 하나였다. 침향은 주로 불교 의례에 사용되었으며, 약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석가탑에서도 침향 조각이 나온 것으로 보아 침향의 역사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침향은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희귀한 것이어서 일부 귀족층 외에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향나무나 참나무 등을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에 묻어 대용 침향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 백 년, 혹은 천여 년이 지나면 향기가 이채로운 침향이 된다고 믿었다.

침향을 만들기 위해 향나무 등을 묻는 것을 `매향`이라고 불렀다. 서해안 쪽에서는 참나무를 많이 묻었고 동해안이나 남해안 쪽에서는 향나무를 주로 묻었다. 적게는 수십 그루에서 많게는 몇 천 그루를 묻었다고 한다.

그러나 매향은 단순히 침향을 얻기 위한 실리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미래불 미륵부처가 만들 새로운 세상에 참여하고 싶은 기원을 담은 신앙의례이다. 매향의례는 우리나라에만 나타나는 민간신앙 행위로서, 시국이 어수선한 고려 말, 조선 초에 주로 행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 곳곳에 매향을 기록한 비석이나 암각 자료가 남아 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경남 사천의 매향비다. 거기에는 향나무를 묻고 침향이 되길 기다려, 미래에 올 미륵부처에게 그 향을 바치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매향을 하면서 비석을 남긴 경우는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비석을 남기지 않으면서 일반 백성들이 매향을 한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간신앙 행위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으므로 확인할 수 없지만, 매향의례는 여말선초가 아니라 불교가 들어온 신라시대나 그 인근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오래된 침향이 후세에 간혹 발견되기도 한다. 매향을 한 시기를 여말선초, 즉 1300년 전후로 잡더라도, 지금 발견되면 거의 천년 가까이 된다. 이 침향은 수많은 시간이 걸려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어찌 보면 열대지방의 진짜 침향보다 더 귀하게 되었다 할 수 있다.

시국이 어수선한 여말선초에 전국적으로 행해졌다니, 1년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백 년 혹은 천 년을 위한 역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었겠는가. 매향을 하는 그들에게 침향이란 미래에 열매 맺을 순수한 마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당대 자신의 행복을 바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참여할 수도 없는 아득한 미래를 위해 나무를 묻는 매향의례는 그래서 신성한 것이다.

침향을 얻기 위해 나무를 묻는 그 순간은 현재이면서 동시에 미래다. 나무를 묻는 것은 현재임에 틀림없지만, 미래의 침향을 위해 묻는 것이니 그것은 미래와 맞붙은 시간이다.

그래서 시인은 침향을 만드는 사람과 그것을 꺼내 쓰는 사람 사이의 이 아득한 시간은 “따분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아니라 한 것이다. 그것은 “침향 내음새 꼬옥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일 뿐”이다. 마치 향냄새를 맡는 그 거리만큼이나 그 시간은 가깝고도 친근한 것이다. 서정주 시인은 왜 이런 시를 썼을까. 그것은 이 아득하고도 넉넉한 마음을 우리 현대인이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서일 것이다. 시인이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침향이 요즘도 선운사 입구의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가끔 나온다고 하며, “이것이 요즘 우리들의 인생관의 근시(近視)에 비긴다면 기막힌 이곳 선인들의 뜻이 아닌가?” 하고 감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먼 미래의 누군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후대들을 위해” 참나무를 묻는 그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몇 년 앞도 내다보지 못 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근시안적 마음만이 우리의 모든 것은 아닐 것이라 믿어본다. 숭고한 그 마음이 어딘가 또 미래를 위해 향기를 머금을 또다른 침향을 묻고 있으리라.

(경북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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