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넘치는 슬픔을 아우르는 형식, 초혼

<초혼> …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에 헤여진 이름이어!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중략)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죽음이 하나의 형식을 얻게 된 것은 언제일까. `주역`에 보면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지 않고 그냥 들에다 두고 풀이나 나뭇가지로 덥고 나무관이나 봉분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에 성인이 나서 상례의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주역`이 말하는 `옛날`은 죽음이 형식을 가지지 못한 때이다. 죽음이 삶의 일상으로부터 독립된 의식과 절차를 부여받지 못 했던 `형식 미달`의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를 보면 죽음이 형식을 갖춘 것은 성인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이라 할 수 있다. 이미 4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그 형식이 있었다. 충북 청원의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흥수아이`를 보면, 돌 판으로 덮은 무덤 안에 국화꽃을 뿌린 흔적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전통이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식의 엄격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그 이면에는 우리의 전통적 무속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유교는 샤머니즘을 이론화한 것`이라 하였던 것이다) 김소월의 `초혼`에 나오는 `초혼`도 그 형식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초혼은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의식으로 `고복`(皐復)이라고도 부른다.

이처럼 죽음이 형식을 지닐 때, 비로소 그 사회는 안정된 상태에 들어서게 된다. 그 형식이 죽음의 슬픔과 공포가 삶의 세계로 흘러넘치지 않게 조절하는 장치가 된다. 그래서 “죽은 혼을 달래는 장치를 잃은 사회에서는 문화가 있을 수 없다.”(김윤식)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는 어떨까. 시 역시 마찬가지다. 슬픔이나 고통 같은 시인의 감정이 흘러넘쳐 시의 세계를 장악하면`주역`의 형식 미달의 단계처럼 비루하고도 비참해진다. 그러나 엄격한 형식에 집착하여 `형식 과잉`이 되면, 감정의 생생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떤 학자는 세 번 이름을 부르는 행위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김소월의 `초혼`이 상례의 초혼 의식을 그대로 반복해 보여준다고, 즉 “고복의식의 철저한 문학적 재현”(성기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자랑이 아니다. 그것은 형식 과잉에 불과하다. 그 경우 시는 형식에 짓눌려 내용의 생생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똑같은 제목으로 시를 쓴 임화의 경우가 그렇다. 그의 시는 “돌아오라/ 박진동 군/ 김성익 군/ 이달 군”(임화,`초혼`)으로 시작하며, 고복 의식에서 `아무개 복`을 외치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또한 짧은 시에서 `돌아오라`를 딱 세 번만 사용하여 초혼 의례를 의식적으로 따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의 내용은 거칠기만 하다. 형식 미달과 형식 과잉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유지하지 못할 때, 시가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차지할 수 없음을 이로부터 알 수 있다.

김소월의 `초혼`도 단번에 안정된 형식을 획득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의 저본이 된 시는 “오오 내 집의 헐어진 문루 위에/ 자리 잡고 앉았는 그 여자의/ 화상(畵像)은 나의 가슴속에서 물조차 날 것마는!/ 오히려 나는 울고 있노라.”(`옛님을 따라가다가 꿈 깨어 탄식함이라`)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무척이나 거친 상태였다.

우선 슬픔이 넘쳐 형식을 무너뜨리고 있다. 또한 산문적인 감정 표현과 지루한 묘사 때문에 시의 가락이 죽어 있다. 게다가 자세한 배경설명 없이 `그 여자`가 갑자기 등장하여, 이 작품은 특정한 시공간에서 얻은 자신의 특수한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왜소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그야 말로 형식 미달의 상태다.

김소월은 이것을 몇 달에 거쳐 수정하여 안정된 형식에 도달한 후`진달래꽃`이라는 시집에 실었다. 표현을 적절하게 조절하여 가락을 살리고, 구체적인 `그 여자`는 일반적인 `그대`로 바꾸었다. 그리고 여기에 제목을 `초혼`으로 붙여 시가 개인적 특수성에서 벗어나 보편성을 얻도록 하였다. `초혼`은 동양 유교문화권에서 이루어진 유구한 문화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의 거친 슬픔이 비로소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적인 슬픔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의 슬픔은 개인적 감정을 넘어 당시의 조국 잃은 슬픔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식민지 통치를 돕다가 죽은 일제 경찰을 위한 초혼제가 주로 신문에 실렸다.(동아일보, 1927.4.27.)

그가 살던 시대는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일본 군경(軍警)들의 초혼제로 넘쳐 나던 시대였다. 거기에는 일제총독부 인사들이 드나들며 초혼의 형식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 형식 과잉의 시대에 김소월이 자신의 슬픔을 `초혼`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경북대 국문과 교수)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