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정부소송 대리… 법적 정당성 보장 받을 것”

경북 예천 출신의 홍성칠(54) 로앤법무법인 대표 변호사는 예천용원초등학교와 예천중학교, 대구고등학교를 거쳐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30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1991년 인천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서울고법 판사를 거쳐 대구지법 상주지원장을 끝으로 법복을 벗은 뒤 지난 2008년 서울에서 변호사사무실을 열었으며, 지난해부터는 로앤법무법인 대표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홍 변호사를 만나 어린 시절의 꿈과 추억, 그리고 법조계에서의 생활과 향후 계획 등을 들어봤다.

어릴때부터 정치인이 꿈… 부모님 권유로 법대 진학

판사시절 희망퇴직… 앞으로 고향 위해 일하고 싶다

-어린 시절의 꿈은 무엇입니까.

◆예천군 용문면 산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아래 자랐다. 어릴 때부터 꿈은 정치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과계열 진학을 목표로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생산활동만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란 판단과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성균관대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학창시절 방황도 있었지만 사법고시에 합격해 17년간 법관으로 재직했고, 지금은 변호사로 뛰고있다.

-고향 예천에서 지내던 시절, 가장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고향마을은 읍내서 40리 떨어졌고, 면 소재지서도 10리정도 들어가야 되는 산골이었다. 내가 90년 결혼할 때까지도 마을 도로가 비포장일 정도였다. 전기도 내가 고등학교 3학년때나 돼서야 들어온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집에서 공부할 때 호롱불 아래서 책을 읽다가 머리카락을 태워먹은 적도 있다. 전화는 마을 동장집에 로터리식 전화기 단 한대뿐이었다. 마을사람을 찾는 전화가 오면 동장집에서는 확성기를 통해 방송으로 “○○씨, 전화왔어요”하고 부르곤 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는 어디를 다녔나.

◆고향마을 옆에 붙어있던 용원초등학교를 다녔다. 마을에 어린아이들이 많아서 한 학년에 100여명정도 다녔는 데, 남녀 2개반이 됐다. 분교가 하나 있었는 데, 10여리 더 들어간 골짜기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내가 다니던 용원초교가 지난 1995년 폐교되고, 분교만 남아있다.

-고향에서의 학창시절 얘기를 듣고싶다.

◆당시에는 중학교 간 친구도 그리 많지 않았다. 여학생은 한명만 예천여자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진학을 하면 대개 읍내서 하숙을 했다. 중학교 진학한 학생이 3명 정도됐고, 사립중학교에 6~7명이 간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면소재지에 중학교가 생기면서 1년 선배들이 뒤늦게 중학교에 진학하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때는 예천읍내 백전동 동산에서 자취를 하며 공부했다. 공동펌프에서 물을 길어다 밥을 해먹었고, 나무와 연탄을 함께 때는 아궁이여서 제재소에서 나무껍질을 벗겨 불쏘시개로 썼다. 연탄은 배달이 안돼 새끼로 묶은 연탄 4장씩을 사서 때거나, 연탄지게로 날라서 썼다. 중학교 1년선배와 함께 자취생활을 했는데, 월세 5천원으로 사글세를 줬던 기억이 난다. 반찬은 집에서 먹던 콩조림이나 무말랭이, 그리고 된장과 간장을 가져와서 해결했다. 금방 한 밥에다 계란 하나씩 부쳐서 참기름과 간장에 비벼 먹으면 그렇게 맛이 있었다. 그 당시 시골에는 돈이 없었다. 대부분 자급자족경제니까 반찬이나 밥을 모두 해먹었다.

-고향 마을 친구들 가운데 서울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있나.

▲고향사람 가운데 서울법대 들어간 선배 한분이 있었는데, 얼마전 타계했고, 대학을 졸업해서 변호사를 하는 사람이 나 혼자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있다. 고향 친구로는 고향에서 농사짓는 친구가 한명 있고, 주로 포항이나 대구, 울산 등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고향 친구들은 10여명 되는 데, 분기별로 모임을 하고 있다.

-고교 친구들은 어떤가.

◆고교 동기 가운데는 현재 대법원장 비서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안철상 판사가 동기다. 지난해 2월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를 하다가 올라왔는 데, 고교때 한반에서 지냈다.

-법관을 꿈꾸게 된 계기가 있나.

◆1976년 대학에 들어갈 때 격동기였다. 학교에 다닐때는 사법시험에 그리 열심이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들의 권유와 훈육에 따라 무의식중에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결국 1988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생활을 시작했다.

-사법시험 합격후 판사와 검사 중 판사를 택한 이유가 있나.

◆먼저 판사를 신청한 것은 사회적 약자를 돕는 데는 판사의 역할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물론 일반론으로 얘기하면 법을 어긴 사람을 잡아다가 수사하고, 구속하는 등 권력은 검사가 더 세지만, 판사는 독립적인 판단아래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돕고, 사회정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더 마음이 끌렸다.

-대구지법 상주지원장을 끝으로 퇴직한 것으로 아는 데, 이유는 무엇인가.

◆법관의 정년은 63세다. 그러나 나는 희망퇴직을 했다. 대개 희망퇴직은 개업 또는 후진을 위해 용퇴하는데, 내 경우에는 직업을 바꿔 정치를 해보고 싶었다. 한나라당 공천신청을 했지만 탈락해 출마를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언제든 고향을 위해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볼 생각이다.

-요즘 법조계의 전관예우에 대해 논란이 많다.

◆내 경우에는 전관예우는 전혀 없었다. 모두들 마지막 근무지에서 옷 벗고 나오면 전관변호사가 된다. 나는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는 데, 마지막 근무지는 상주지원장이니 전관예우를 받을 상황이 아니다. 그러고 싶었으면 서울에서 옷을 벗었을 것이다.

-개인변호사 사무실이 아니라 법무법인 대표변호사로 일하는 데, 차이점이 있나.

◆개인 변호사 사무실 보다 팀을 짜서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수임하는 업무는 같지만, 의뢰인들 입장에서는 덩치가 커지니까 신뢰감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김앤장·율촌·광장 등 우리나라 7대 메이저 로펌의 경우 대기업들의 소송을 의뢰받는데, 많은 전문인력을 확보한 게 장점이다. 튼튼한 인적 구성원이 있으면 대기업에서도 소송을 맡길 때도 안심하고, 법률사무소 입장에서 역할을 분담해서 일을 하면서 공동수행하게 된다. 법관시절 함께 자주 술을 마시고, 어울리던 동료 법관 2명과 함께 공동대표 변호사로 사무실을 냈다. 의정부 분사무소에 1명, 서초사무실에 2명의 대표변호사가 근무하고, 전체 변호사는 7명이다. 지금은 부장판사 출신으로 구성돼 있지만 앞으로 검사출신 변호사도 영입할 계획이다.

-4대강 소송으로 분주한 데, 어떤 내용인가.

◆지난 달 3일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는 경모씨 등 6천129명으로 구성된 `4개강 사업 위헌·위법 심판을 위한 국민소송단`이 한강구역공사를 취소해달라며 국토해양부를 상대로 낸 하천공사시행계획 취소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전국에서 이와 같은 취지의 소송이 11건이 제기돼 있다. 내가 이 소송에서 정부측 대리인으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미 지난 달 한강과 낙동강, 그리고 13일 금강에 대한 소송에서 승소했다. 이제 영산강에 대한 소송만 남은 상황이어서 머지않아 4대강 사업의 법적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