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날, 그의 가슴에 흐르는 눈물…

<불놀이> ………………………………………………………………………………………… 주요한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쓰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중략)”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 밤! 너의 발간 횃불을, 발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발간 눈물을….

백석의 `국수`에 나타난 흥겨운 축제의 세계를 떠난 근대인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그를 주요한의 `불놀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 속에서 많은 사람들로 흥성거리는 축제일에 `왜 나만 눈물을 참을 수 없는가?` 하고 묻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지금 어떤 축제를 보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축제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큰 길을 물밀듯이 몰려가는 걸까. 그것은 평양 대동강 가에서 펼쳐지는 사월 초파일날의 `불놀이` 축제다.

이 불놀이는 폭죽을 터트리는 그런 놀이라기보다, 강 언덕과 강물 위의 배에 수많은 등불을 달아놓고 보고 즐기는 놀이다. 특히 배에서는 횃불을 피워 강 가운데서 불꽃놀이 하듯이 던지며 논다. 물론 시에 나오듯 `매화포`라는 폭죽을 터트리는 불꽃놀이가 있지만, 중심은 관등놀이인 것이다.

`불놀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풍경에 대해 시인 김억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까만 밤중에 여러 수십 척 여러 수백 척의 배를 강물에 띄우지요. 20만 시민은 집을 모다 비우고 나와선 더러는 배 타고 더러는 강가나 철교 위에서 구경하고, 배라니 그것은 지붕을 씌운 집배(屋船)인데, 볏짚으로 화톳불을 하여서 강 가운데 이르렀을 때 하늘 공중 높이 뿌리기도 하고 강물 우에 던지기도 하고…, 그러니까 여러 억십만 별들이 하늘에 날듯이 까만 밤중에 불꽃이 요란스럽게 호화찬란하게 날지요.”

20만 시민이 집을 비우고 모두 나와 강가에 자리 잡고 강 위에서 벌어지는 찬란한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 그리고 배에서 던지는 횃불의 불티들이 밤하늘에 흩어지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 축제의 규모나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김동인은 그의 소설 `눈을 겨우 뜰 때`에 이 축제의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강 좌우편 언덕에 달아놓은 불, 배에서 빛나는 수천의 불, 지걱거리며 오르내리는 수없는 배, 배 틈으로 조금씩 보이는 물에서 반짝이는 푸른 불, 언덕과 배에서 지껄거리는 사람의 떼, 그 지껄거림을 누르고 때때로 크게 울리는 기생의 노래, 그것을 모두 싼 어두운 대기에 반사하는 빛, 강렬한 사람의 내음새, 연화(煙火) …. 유명한 평양 사월 파일 불놀이의 경치를 순서 없이 벌려 놓으면 대개 이것이다.”

이 묘사가 `불놀이`라는 작품의 배경을 잘 보여준다. 김동인은 이때 동원되는 배가 5, 6백 척이 된다고 쓰고 있다. 그 많은 배들에 달린 등과 횃불의 불빛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강가 풍경을 생각해보면, 이 축제의 분위기를 충분하게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찬란하고도 흥겨운 축제를 아무 흥미 없이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문제(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에만 골몰하고 있다. 그리고 매화포 소리에 깜짝 놀라 새로운 다짐을 하지만, 그것은 축제와 아무 상관없는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는 교훈일 뿐이다.

`불놀이`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근대사상과 문예`라는 글에 이런 근대인을 지적하고 있다. 그 글은 근대인의 특징을 `개인주의적 방관적 태도`에서 찾고, 이런 태도는 “잔치 자리에서 남들은 모두 재미있게 떠드는데도 자기 홀로는 술잔을 손에 잡지 아니하고 싸늘한 비꼬는 안목으로 흘금흘금 둘러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 근대인이 바로 `불놀이`에 나오는 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따스한 공동체 정신이 살아있는 축제의 세계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근대인의 전형이다. 이제 축제를 떠나 고립된 채로 모든 것을 헤치고 나가야 할 근대인인 것이다.

지금의 수많은 축제도 신성함과 공동체 정신이 사라지고, 상업성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전의 신성한 축제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 어쩔 수 없는 근대인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