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뭅니다. 당신의 사랑은 올 한해도 과분했습니다. 십 년 만의 강풍에 뒷산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던 당신의 간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강풍이 아니라도 원래 산은 조금씩 변해왔겠지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구요. 어쩌면 거기 드높이 서 있는 산일수록 그 속은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폭포수처럼 치솟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산은 변함없이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어리석은 믿음 때문에 그 흔들림을 쉬이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인 게지요.

실은 `통째로 흔들리는 산`을 보고 힘겨워 미치는 게 삶이라고 당신이 말을 걸어왔을 때, 속으로 조금 위안을 받았답니다. `누구나 그러하니 흔들릴 땐 크게 흔들려라`고 당신이 덧붙였을 땐, 마구 밑줄을 긋고 싶었더랬지요. 삶이란 깊고 드높은 산맥의 연속이지요. 그 속에서 통째로 흔들리는 산을 한두 번 경험하지 않는 자 누구일까요?

`하늘거리는 장다리꽃` 정도에 비유할 수 있는 생이라면 그야말로 행운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낭만적 애상에 비견되는 삶은 싱거운 만큼 그 뿌리도 얕을 수밖에 없겠지요. 얽히고, 설키고, 꼬이고, 치이고, 홀치는 게 삶이더란 말입니다. 그 정도는 돼야 산이 통째로 흔들리는 걸 볼 수 있다고 당신은 가르치는 게지요.

사실 당신 앞에서 이런 주절거림을 하게 된 것도 모두 당신의 가르침 덕분이지요. 대부분 사람들은 사소한 일로 크게 힘들어 하지요. 당신이 내게 한 말을 기억하나요? - 일상에서 천사의 칼끝을 보는 것과, 악마의 순정을 만나는 것은 한 끝 차이랍니다. 그러니 너무 힘겨워 마시라고. 그런 통찰을 언제나 나보다 한발 앞서 발견하는 당신. 그래서 당신에게 많은 걸 의지했는지도 모릅니다.

일상에서 천사와 악마는 절대성을 띄지 않는답니다. 다만, 상대적일 뿐이지요. 내게 천사는 타인에게 악한이요, 타인에게 천사는 내게 악한일 수도 있는 게 인간사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사람들이 신을 찾겠어요? 인간사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그리도 명쾌하다면 굳이 사람들이 신을 찾을 필요가 없을 테지요. 내 속에 또한 타인 속에 천사와 악한이 공존하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두렵고 괴로운 거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찾는 거랍니다.

이제 답이 보이나요? 내 곁의 천사를 보듬는 일도 내 안의 악한을 물리치는 것도 다 자신과의 싸움이랍니다. 혐의 없음·무죄인 타인을 향한 투사는 부질없는 짓이지요. 당신이 내게 물었지요? 겨울 한철 도드라지는 뒤꿈치의 각질을 경험한 적 있냐구요? 물론이지요. 흔적조차 없이 온 여름내 숨어 있던 각질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뒤꿈치부터 스멀스멀 돋아나기 시작하지요. 눌려 있던, 거역할 수 없는 야만의 찌꺼기들이 생의 뒷전으로 숨어들어 툭툭 골을 내고 허연 먼지바람을 불러일으키더군요. 그냥 두면 깊어진 골 사이로 먼지의 두께는 한량없이 부풀어가고 급기야 피가 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매일 각질을 씻어내고 피부연화제를 발라주면 어느새 뒤꿈치는 삶은 계란 같이 되지요. 그렇게 환부를 씻어내고 영양제를 바르는 일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고 당신은 강조했지요.

아닌 게 아니라 올 한해 당신에게서 많은 걸 배웠답니다. 사랑의 여러 갈래와 상처를 건너는 법, 타인을 이해하는 눈과 나를 용서하는 길을 가르쳐준 당신. 당신이 없었다면 내 일상의 뒤꿈치는 허연 가루 날리는 피범벅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란 유연한 물, 당신이란 적정의 영양제 덕분에 올 한해가 견딜만했습니다.

곧 새해입니다. 내년에도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변함없겠습니다. 큰산이 흔들린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알려주는 당신, 누구나 뒤꿈치 각질을 연마해야 하는 겨울이 있다는 것을 깨치게 해주는 당신, 당신 그 귀한 이름을 불러봅니다. 당신의 이름은 책입니다. <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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